## 유달리 단명 많지만 충성·보국의 전통은 숙명으로 ##.

♧음력 2월 보름이지만 낮부터 내린 비로 칠흙같은 어둠과 안개가 자
욱이 깔린 지난 4월 1일 자정.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현충사 경내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고택 마당에서는 혼을 불러 들이는
장작불이 피어 올랐다.

이 장군의 부인인 정경부인 상주 방씨의 기제사날. 종가집은 제사를
앞두고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안채 부엌 가마솥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연
이어 솟아 올랐고 망건과 옥색, 흰색의 도포를 차려입은 노소의 제관들
이 사랑채 방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척부터 멀리는 파
종이 다른 친척들까지 30명 남짓의 제관들은 안채 방에 미리 준비해둔
제물들을 부지런히 날라왔다.

안채 대청마루에는 장군이 명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창, 칼, 영기 등
명조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종가집이 '장
군의 집안'임을 보여주는 위세 당당한 병풍이었다. 그 앞으로 위패를 모
시는 교의, 제사상이 흰 휘장에 쌓여 있었다. 이윽고 휘장이 걷히고 밤,
은행, 사과, 감, 육포 등 제물들이 속속 제 자리를 찾아갔다.

반드시 종부들이 직접 빚어 제사상에 올리는 이 집안 특유의 동동주도
퇴주 그릇과 함께 등장했다. 70년대 중반 이곳에 들른 박정희 대통령이
일정을 바꿔 50잔이나 먹었다는 일화가 전하는 바로 그 술이다.

젊은 제주 이재엽(29)씨가 등롱을 든 제관들을 앞세우고 사당으로 향
했다. 제사에 모실 위패를 갖고 오기 위해서이다.

"영이 현십오대조비 정경부인…" 한 제관이 정경부인에게 제사를 위
해 위패를 모셔감을 알렸다.

제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위패를 교의에 앉히고 제주를 올린 뒤
차례대로 항렬에 따라 제관들의 절이 이어졌다. 가끔 낡은 고택의 대청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익
숙한 솜씨로 제사를 진행하는 젊은 제주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영웅 자손
들의 운명이다. 투옥과 스캔들로 이어진 나폴레옹의 후손들이 그랬고,
'주먹세계'의 대부였던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씨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마쳤다. 이런 징크스 때문일까. 이순신 장군 종가는 손이
귀하고 후손들이 단명하는 달갑지 않은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충무공 할아버지 이후 자손들 중에 환갑을 넘어 산 할아버지가 별로
없을 만큼 단명했습니다. 종가집인 저희 집만 해도 증조부와 조부가 모
두 양자로 들어왔어요." 이날 제사의 제주이자 종가집의 둘째 아들인 이
재엽씨는 "지금도 집안에 4촌이 전혀 없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 6촌일 정
도로 손이 귀하다"고 말했다.

충무공의 15대 종손인 이씨의 형 재국(62)씨도 젊어서부터 건강이 좋
지 않아 돌아가신 노종손 부부의 애를 태웠다고 한다.

형제의 나이 차이가 33살이나 돼 재엽씨에게는 아버지 나이뻘이 되는
종손 재국씨는 한때 집안에서 촉망받던 인물이었다. 이종찬 국가정보원
장,김우중 대우 회장, 고건 서울시장 등을 배출한 '경기고 52회 출신'으
로 연세대 법대를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젊어서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정상적인 종손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종손의 건강을 걱정한 노종손 이응렬(93년 작고)씨와 노종부 권
오창(97년 작고)씨는 만약의 일을 대비해 늦둥이를 가졌는데 그가 바로
재엽씨인 것이다. 노종부의 나이 52살이었던 1970년의 일이다.

그가 자라나면서 늙은 종손과 종부는 당연히 여러가지 일을 그에게 다
짐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형이 후사를 얻지 못하면 반드시 사내 아이를
낳아서 형에게 양자를 줄 것' '형을 도와서 종가의 대소사를 무난히 처
리할 것'등등이었다. 작고한 부친은 유언장에서도 재엽씨에게 이런 당부
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아주 특별하다고 할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재엽씨의 '종손 대리' 생활은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
됐다. 지방으로 요양을 다니는 형을 대신해 종손으로서 제사를 주관하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 15년이 넘은 일이다.

대학 졸업식 사흘 만에 25살의 나이로 결혼한 것이나 번거로운 직장
대신, 필요할 때마다 종손인 형을 돕기 위해 달려올 수 있는 컴퓨터 대
리점을 차린 것 등이 모두 이런 선친의 유언을 받들기 위한 것이었다.

"90년대 초반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돌보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충무공의 자손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종가의 전통을 제대
로 이어가는 일이 제가 할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결코 달
갑지만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이런 일들이 이재엽씨에게는 이제 "짐이
아니라 당연히 할 일"이 됐다고 한다.

오히려 재엽씨에게서는 '충무공의 자손으로서 결코 부끄럽지 않았던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나 아버지 만큼은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마저 엿보
였다. 해방 직전 타계한 그의 할아버지 이종옥옹은 종가보호 재산을 담
보로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아버지 이응렬씨도 일제 말기에 현충사에 놀
러온 학생들을 상대로 충무공의 업적을 이야기하다 두차례나 옥고를 치
렀다고 한다.

"요즘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태라서 점점 더 '나라에 충성한다'는 가
치가 사라져가고 있어서 충무공의 후손으로 안타깝습니다. 결국 앞으로
도 나라는 우리가 몸을 담그고 살아야 할 중요한 그릇 아니겠습니까."
컴퓨터를 좋아하고 아마추어 무선통신(HAM)을 즐기는 이 신세대 청년의
입에서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얘기들이 툭툭 터져나왔다.

몸이 아픈 종손을 대신해 시동생 이재엽씨와 함께 종가집을 꾸려가고
있는 종부 최순선(43)씨는 "종손과 시동생간의 따뜻한 형제애가 이 어려
운 종가집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숨은 힘"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딸만 둘을 낳은 이재엽씨에게 남은 숙제는 형에게 양자를 보
내야 할 아들을 낳는 것. 그러나 부인 홍정희(29)씨도 "기꺼이 충무공
종가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겠다"는 입장이어서 종부의 짐을 반쯤은 덜
어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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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 이씨 가문
문무 겸비한 충국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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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 이씨를 대표하는 두 인물은 조선조에서 각각 문무 양쪽에서 최
고의 인물로 꼽히는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덕수 이씨 가문은 시조의 4세손인 이윤온·윤번 형제대에서 크게 두
파로 갈라지는데, 맞이인 이윤온의 후손 중에서는 율곡 등 뛰어난 문신
이 많이 나왔고, 윤번의 후손 중에는 충무공 등 무신이 많은 것이 특징
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나이는 율곡 선생이 7살 위였지만
이순신 장군이 시조의 12세손으로 13세손인 율곡 이이의 아저씨 뻘이
된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일화도 전해진다. 32살의 나이로 뒤늦게 무과에 급제
한 이순신 장군은 고속 승진을 계속해 전라도 발포 지역의 수군만호(종
4품)가 된 1582년 상관의 악의적인 보고로 파직되고 말았다. 이 때 이
순신과 동문수학한 서애 유성룡 선생이 `일가친척인 이조판서 이이 선
생을찾아가 보라'고 하자 이순신은 `일가라고 찾아가는 것은 옳지 않네'
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시조는 고려 중기 무관인 중랑장 벼슬을 지낸 이돈수. 본관인 덕수
는 원래 경기도 개풍군(현 개성)에 있던 곳으로, 현재는 북한의개풍군
중면 지역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문신으로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이를 비롯해 인조 때
대재학을 지낸 이식과 청백리로서 예조판서를 지낸 이안눌,영조때 대사
간을 지낸 이겸빈,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병모 등이 있다. 무관으로
는 충무공의 조카로 임진왜란 때 종군한 이완(의주부윤), 영조때 훈련
대장을 지낸 이봉상, 철종 때 어영대장을 역임한 이승권, 고종조 좌영
사 이규섭 등이 유명하다.

유명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데 비해 인구는 적어 85년 경제기획원 조
사 당시 남한 내 인구는 4만3505명. 충무공 사후 온양 일대에 많은 농
토를 내려 이곳에 많이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종남 전 법무장관, 이종호 전 원호처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민우,
이종남씨 등이 이 집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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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마치고
학계에 잘못 알려진 '사실'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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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시작해 익히 들어오는 이순신 장군이지만
그 생애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이 장군이 청년기에 서당선생을 지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장군이 조선 중기 덕연군 이정의 셋째 아들
로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태어나 8살 때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다고 보고 있는데 후손들은 "사실과 다르다"
고 말했다.

덕수 이씨 대종회 부회장을 지낸 이종국(76)씨는 "장군이 한때 서울
에서 한문선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10대 후반에 아산으로 내려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서애 유성룡 선생과 동문수학을 했던
점도 청년기에 아산으로 이사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고 한다. 어
떻든 충무공은 청년기까지만 해도 무관의 길보다는 과거 수업을 해온
선비집안의 자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으로 내려온 뒤 21살에 장군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 분이 이날 제사를 지낸 유명한 정경부인 상주 방씨이다. 충
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그 부하였던 이운룡이 삼도수군통제사
로 임명돼 삼현육각을 불며 말을 탄 화려한 행렬로 부임 인사를 오자
"돌아가신 옛 상관의 집에 인사를 오면서 예를 갖추지 못했다"며 예단
받기를 거부해 이운룡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방씨 부인은 무남독녀여서 이 장군이 방진의 집에 데릴사위로 살림을
차렸는데 이 집이 지금도 남아 있는 이 장군의 종가집이다. 이종국씨는
"충무공 고택이 장군의 외가집이었다고 알려진 것도 잘못된 얘기"라고
말했다.

이 장군의 장인이었던 보성군수 방진은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완전히
바꿔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문과 시험을 준비중인 사위에게 "기골이 장
대하니무과로 바꿔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좇아 충무공은 32
살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사위의 인물 됨됨이를 제대
로 살핀 장인의 혜안이 나라를 백천간두의 위기에서 구해낸 셈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태어나고 내륙인 충남 아산에서 청년기를 보낸 장
군의 이력으로만 보면 충무공이 세계 해전사에서 보기드문 해군의 명장
이 됐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수군 경력이 없진 않지
만 청년 장교시절만 해도 충무공은 주로 여진족과 싸우며 보냈기 때문
이다. 후손들의 말처럼 '하늘이 내리고 역사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
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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