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 당시 국민이 모은 금이 227톤이었다. 국내 채굴 금은 연 1톤 수준이고, 수입 금 대부분은 가공, 재수출돼 왔기 때문에 장롱 속 금은 대부분 밀수 금으로 추정됐다. 예부터 금 밀수 주요 루트 중 하나가 여수였다. 일본과 가깝고, 섬이 많아 숨을 곳이 많았다. 세관원 출신의 여수 밀수왕 허봉용은 여수를 밀수 중심지로 키웠다.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1970년대 동양 최대 석유화학 단지가 조성되면서 여수는 공업 도시로 탈바꿈한다. 소백산맥 끝자락의 넓은 구릉지대였고, 항구와 가까워 공업 단지, 수출 기지로 적격이었다. 섬진강이 지척이라 공업용수 조달도 용이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비료와 석유화학 제품은 한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키우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2022년엔 여수 산업단지의 수출액이 521억달러에 달했다. 산업단지 덕에 여수는 전남권 총생산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호남권 중심 도시가 됐다.
▶2012년 여수 엑스포 개최 이후 여수에선 관광업도 급성장했다. 한 해 여수를 찾는 관광객이 1500만명대로 불어났다. 여수의 낭만을 노래한 ‘여수 밤바다’도 일조했다. 여수 경제가 피크를 쳤던 2020년, 여수 시민의 연평균 소득은 9459만원으로, 광주시민(2843만원)의 3배를 웃돌았다. 이즈음 재벌그룹 총수들의 여수 섬·땅 투자가 화제가 되며 부동산 투기꾼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2020년대 들어 중국이 석유화학 자립에 나서고, 산유국 중동 국가들이 자체 석유 정제 시설을 구축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세계적 공급 과잉 탓에 LG화학·롯데케미칼 등 여수 산단 대표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여수시의 법인세 세수가 2020~23년 평균치 대비 66%나 격감했다. 정부가 1일 여수시를 제1호 ‘산업 위기 대응 지역’으로 지정했다. 경영난을 겪는 기업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고, 산업 구조조정을 추진한다고 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2012년 여수의 한 섬에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 생각을 하는 공간’이란 의미로 ‘미역창고(美力創考)’를 만들어 정착했다. 그는 “외로움이 성찰의 밑거름이 된다”면서 여수의 바다 풍경을 격찬한다. 하지만 여수가 산업 위기 지역으로 가장 먼저 지정됐다는 소식은 여수 바다마저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다. 중국의 비약적 발전 탓에 석유화학만이 아니라 우리 산업 대부분이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2호, 3호 위기 지역이 이어질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