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 경험 있어요? 솔직하게 얘기해야 우리가 조치를 해줄 수 있어요.”
2년 전 한 연예기획사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은 이연경씨는 기획사 임원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이씨는 “없다고 했는데도 압박 면접처럼 꼬치꼬치 캐물었다”며 “친구를 괴롭히거나 돈을 뺏는 행동 말고도 술·담배 하고 다른 일진과 어울린 경험도 문제 될 수 있다고 겁을 주더라”고 했다. 실제로 이씨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술·담배를 하며 방황한 적이 있어서 그 당시 찍은 사진 몇 장을 회사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씨는 결국 기획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그땐 내가 술·담배 한 걸로 떨어진 걸까 싶어 기분 나빴는데 요즘 연예계 학교 폭력 문제 터지는 거 보니 안 하길 잘했다 싶다”고 말했다.
여자 배구계의 쌍둥이 스타 이다영·재영 자매에게서 타오른 ‘학교 폭력 폭로’의 불길이 야구·축구 등 다른 스포츠 종목을 넘어 연예계까지 옮아 붙는 양상이다. 최근 며칠간 조병규, 박혜수, 현아 등 스타급 연예인들이 과거 학창 시절 학교 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와 “사실무근”이란 반박이 이어지면서 진실 공방까지 벌어지는 중이다. 이외에도 신인이나 무명까지 가리지 않고 매일 1~2명씩 새로운 연예인들의 학교 폭력 의혹이 나오고 있다. 한 중견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소속 연예인들을 믿지만, 사전 대응 차원에서 학교 폭력 관련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증이 있으면 거른다
“일단 학생기록부에 학교 폭력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면 무조건 거릅니다. 빼도 박도 못 하는 거니까요.”
한 대형 기획사 간부는 “학교 폭력 문제는 연습생 시절부터 미리 검증하는 게 최선”이라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획사라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쓴다”고 했다. 첫째는 학생기록부와 사진, 메신저 대화 등 학교 폭력 사실이 물증으로 남아있는지 검증한다. 본인과 부모는 물론, 담임교사를 찾아가 묻는 경우도 있다. 소셜미디어 활동도 검증 대상이다. 필수 체크 대상이 인스타그램 비밀 계정이다. 따돌림 등 폭력 행위나 술·담배 등 일탈 행위를 하는 10대 중에 함께 일을 저지른 친구들만 볼 수 있는 비밀 계정에 이런 행동을 올려두고 끼리끼리 돌려보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전 조사를 통해 학교 폭력 사실이 드러나면 대부분 연습생 영입을 하지 않지만 예외도 있다. 12년 경력의 매니저 김모씨는 “지금 가수로 데뷔한 친구 한 명이 학교 폭력 사실을 고백해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본 뒤 그 친구를 데리고 피해자를 찾아간 적 있다”며 “피해자 앞에서 솔직하게 잘못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한 덕분에 둘이 끌어안고 펑펑 울면서 화해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이른바 ‘평판조회’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가수나 배우를 꿈꾸는 친구들 중엔 이미 학창 시절부터 인근 지역에서 준(準)연예인급으로 유명했던 경우가 더러 있다”며 “그런 친구들은 학교 친구나 지인들을 상대로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학교 폭력 문제도 같이 체크한다”고 말했다. 기획사들이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는 건 학교 폭력 사건이 학교나 교사 모르게 이뤄지는 일이 많아서 당사자가 숨기면 파악할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학교 폭력 가해자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걸그룹 시스타 출신 가수 효린이 그런 경우다. 2019년 효린의 동창생이 학창 시절 그로부터 학교 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지만, 효린은 “(관련)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며 결국 피해자와 직접 만난 뒤 “오해를 풀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사전 검증이 완벽할 수 없다. 기획사가 경찰처럼 공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전문성도 없는 직원들 선에서 학교 폭력 같은 문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검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획사 입장에선 학교폭력 문제에 노출되는 일이 적을 정도로 어린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으로 영입해 육성한다면 위험이 적겠지만 학교 폭력 문제를 막자고 초등학생만 뽑을 수도 없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이다.
그나마 연예기획사는 소속 가수나 배우를 위해 인성 교육까지 포함, 체계적 트레이닝 시스템을 갖추고 10대 때부터 사생활을 통제하면서 학교 폭력 문제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반면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해 거의 손을 놓고 있던 스포츠계는 이번에 연이어 터지는 학교 폭력 폭로에 홍역을 치르는 중이다. 급기야 삼성화재 소속 남자 프로배구 박상하 선수는 지난 22일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저지른 사실을 인정한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은퇴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모든 폭로가 진실은 아니다
물론 모든 폭로가 가해자의 사과와 처벌로 끝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최근엔 근거가 불분명한 학교 폭력 의혹 제기가 이어지면서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아이돌 가수 현아가 대표적이다. 지난 23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현아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지만, 실제 글 내용은 “증거는 다 사라졌지만 아직도 기억난다”며 “초등학교 5학년 축제 당시 현아에게 뺨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폭로 글을 올린 사람이 증거로 첨부한 건 현아의 초등학교 졸업 사진이 전부였다. 현아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며 “누구를 때린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현아의 해명이 나온 후 해당 폭로 글은 삭제됐다.
걸그룹 ‘이달의 소녀’의 멤버 츄(본명 김지우)도 지난 23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학교 폭력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소속사가 사실무근이라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자 폭로 글을 쓴 당사자는 하루 만에 “학창 시절 지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과장된 것 같다”며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아이돌 그룹 ‘워너원’의 멤버 박지훈도 중학교 동창생을 자칭한 이가 학교 폭력 피해자라고 수차례 글을 올리면서 이슈가 됐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글 작성자는 박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거짓 폭로가 이어질 수 있는 건 연예인의 학교 폭력 폭로 사건은 파급력이 큰 반면, 당하는 연예인 입장에선 법적 대응을 하는 것이 부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별다른 물증 없이 피해자의 기억과 진술에만 의존하는 학교 폭력 사건의 경우 이 폭로가 허위라는 걸 입증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사실 관계에 대한 진실 공방이 이어지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 것도 결국 연예인이다.
배우 조병규의 경우 지난 17일 뉴질랜드 유학 시절 학교 폭력 가해자였다는 폭로 글이 올라왔지만 곧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병규가 초등학교 때 길을 가로막고 자전거를 빌려 달라고 협박했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축구공을 뺏어갔다”는 식의 폭로 글이 계속 올라왔다. 이런 세세한 사실 하나하나가 나올 때마다 인터넷 매체들을 중심으로 수십건의 기사가 쏟아지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연예인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반면 허위 글 폭로자는 정도가 아무리 심해도 보통 벌금형에 그친다. 박지훈의 허위 폭로 사건을 맡았던 고승우 변호사는 “시간·장소까지 특정한 구체적인 폭로 글이었는데 막상 게시자를 찾고 보니 박지훈씨보다 8세나 많은 회사원이었다”며 “그저 재미로 그런 글을 썼다고 했는데도 결국 벌금 100만원형에 그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