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10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내 총 12개 주요 도시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지난 8일 발생한 케르치해협 대교(일명 크림대교) 폭발 사건을 우크라이나 정부의 테러 행위로 규정한 지 하루 만이다. 러시아 내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개인적 분노가 더해지면서 즉각적인 대규모 공격 지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러시아군이 10일 오전 6시 20분부터 오전 11시 15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84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일부 미사일은 벨라루스와 크림반도에서 발사됐으며, 드론도 24대 동원됐다고 합참은 덧붙였다. 미국 전쟁연구소(ISW) 집계에 따르면 수도 키이우 외에도 르비우와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등 서부 6개 도시, 하르키우와 수미 등 북부 2개 도시, 드니프로와 키로보라드 등 중부 도시 2곳, 남부 자포리자까지 총 12개 도시가 공격을 받았다.
이번 공격에 대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은 텔레그램에 올린 글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지속적, 직접적, 명백한 위협을 가한다”면서 “(이번 공격은) 1탄에 불과하고 (공격이) 더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대한 공격은 지난 7월 말 이후 3개월 만이며, 르비우와 드니프로에 대한 공격은 지난 5월 중순 이후 5개월 만이다.
키이우에서는 출근 시간대 시내 한복판에 4기의 미사일이 떨어져 최소 20여 대의 차량과 건물 여러 채가 파괴됐다. 이 과정에서 시민 5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다쳤다.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서부 르비우에서는 폭격으로 이동통신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됐다. 중부 드니프로와 남부 자포리자 등에서도 피해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피해 상황이 확인되지 않는 가운데 도시 곳곳에서 차량이 불타는 모습, 파괴된 상업 시설과 주거용 건물, 부상한 시민이 치료받는 모습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 중이다.
푸틴 대통령은 10일 국가 안전보장회의를 소집, “오늘 아침 국방부의 제안과 군 참모부의 기획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에너지와 군사 지휘 시설을 대상으로 고정밀 장거리 무기(미사일)를 이용한 대규모 공격을 펼쳤다”고 밝혔다. 이날 공격이 크림대교 폭발에 대한 보복 공격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크림대교 사건을 빌미로) 우크라이나를 지도상에서 지우려 한다”며 다른 국가들의 지원을 호소했다.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타깃으로 한 10일 러시아의 대규모 미사일 공격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대교 폭발 사건을 “우크라이나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직후 이뤄졌다. 푸틴 대통령은 바로 전날인 9일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 합동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크림대교 사건에 대한 예비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이번 사건이 러시아 주요 민간 인프라를 파괴하려는 테러 공격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또 “(크림대교 폭발을) 기획한 자들과 감행한 자들, 배후에서 지원한 자들은 우크라이나 비밀 특수 기관”이라고 말했다.
메드베데프 부의장도 이날 “크림대교 폭발 사건은 우크라이나 범죄자 정권이 저지른 테러 행위”라며 “러시아의 유일한 대응은 테러리스트들을 직접 패망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보복’을 요구한 셈이다. 러시아는 이미 폭발 사고가 벌어진 8일 밤부터 보복 공격에 나설 태세를 보였다. 이날부터 9일 새벽까지 자포리자시 민간인 거주 지역에 미사일 20여 발이 떨어져 주거 시설과 상점, 사무실, 학교 등이 파괴돼 13명이 사망하고, 60여 명이 다쳤다. 10일 우크라이나 전역에 벌어진 미사일 공격까지 포함하면 100~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들은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가 이날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가한 미사일 공격은 대부분 시내 중심가를 노린 것이었다. 키이우시 당국은 이날 “러시아의 미사일이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 대통령궁이 있는 페체르스키 지구와 키이우 국립대가 있는 포딜 지구, 성 소피아 성당 등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세우첸키우스키 지구 등에 떨어졌다”고 밝혔다. 기존 미사일 공격이 시내 중심보다 외곽의 민간인 거주 구역이나 유류 저장 시설, 변전소 등 사회 기반 시설을 노린 것과 비교해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영국 BBC는 “전쟁 초기의 공격에 비해 미사일 낙하 지점이 훨씬 시내 중심부로 이동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자국이 당한 피해에 대한 ‘보복’에 초점을 맞추면서 공격 방식도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한편 러시아 인권운동가 이리나 셰르바코바는 9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방법은 단 하나, 우크라이나의 승리밖에 없다”며 “오직 이 방법만이 유럽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7일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알’의 공동 설립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쿠바 미사일 사태로 핵전쟁 위기가 고조됐던 1960년대 상황을 언급하며 “그때도 갈등과 긴장의 고조가 있었지만, 평화의 길이 선택받았다”며 푸틴 대통령이 핵 사용 위협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