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군이 근처에 없어서 상대와 싸우면 안 돼요.” “이럴 땐 아군하고 같이 움직여줘야 아군이 고립되지 않죠.”
강의실 앞 대형 모니터에 뜬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롤)’를 보면서 채광진(28) 코치가 세세한 조언을 하자, 앳된 얼굴의 10대 수강생 5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 26일 찾은 서울 강남구의 ‘T1 E스포츠 아카데미’는 한 달에 수강료 80만~120만원을 받는 학원이지만, 여느 학원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강의실엔 최신 컴퓨터가 빼곡하고, 수강생들은 5명씩 한 팀을 이뤄 20~40분씩 게임을 하고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 채 코치는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청소년들을 위한 학원으로 작년 9월에 문을 열었다”며 “현재 5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고, 수강생이 지속적으로 느는 중”이라고 했다.
◇ 확산하는 ‘프로게이머 아카데미’… E스포츠 학원 강남 ‘T1 아카데미’ 가보니…
E스포츠가 점차 산업의 한 축으로 부상하며 ‘프로게이머 연봉 6000만원’ 시대가 열리자 E스포츠 구단들이 전문 아카데미를 앞다퉈 열고 있다. 구단은 미래의 선수로 키울 연습생을 육성하고, 청소년들은 미래의 직업을 위해 이곳을 찾는 것이다. T1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SK텔레콤을 비롯해 DRX·담원·한화생명 등 E스포츠 구단 10곳 가운데 8곳이 직접 운영 또는 위탁 형태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부천의 고교 1학년 박하준(16)군은 올해 2월부터 T1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학교를 조퇴하고 밤 10시까지 아카데미에서 게임 수업을 듣고 연습한다. 박군의 아버지 박승권(47)씨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아들이 잠을 아껴가며 게임 강의를 듣고 연습을 하는 걸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1990년대 스타크래프트의 인기와 함께 등장한 ‘프로게이머’는 “돈 벌기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했지만, 최근 각종 게임리그가 정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E스포츠 업계 관계자는 “현재 한국 롤 리그 1군에서 뛰는 선수와 감독은 최저 연봉 6000만원, 코치 역시 4000만원의 최저 연봉을 보장받는다”며 “대회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기본 연봉이 보장되는 ‘연봉 스포츠’로 변해가는 중”이라고 했다. 과거엔 재야의 ‘아마추어 고수’를 발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엔 아카데미를 통해 우수자를 선발하는 시스템도 정착돼 가고 있다.
◇미래 직업으로 ‘프로게이머’ 꼽는 아이들
직업으로서 프로게이머의 인기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교육부 조사에서 프로게이머는 초등학생 희망 직업 7위에 올랐다. E스포츠 업계 관계자는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출생이 대부분”이라며 “이들은 자라면서 스타크래프트 같은 온라인 게임을 했던 세대이기 때문에 과거보다 게임에 더 열려있는 경향을 보이고, 이런 것이 자녀들의 희망 직업 선호에도 반영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E스포츠 특기생’ 자격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2019년 서울에 처음으로 ‘젠지 엘리트 아카데미’를 만든 미국 E스포츠 구단 젠지(Gen.G)가 대표적이다. 젠지 측 관계자는 “일반 교과목 수업과 게임 수업을 동시에 진행해 혹시 프로게이머가 되지 못하더라도 E스포츠 특기생 자격으로 미국 대학에 들어갈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다만 게임으로 진로를 택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게임 아카데미 관계자는 “프로게이머가 된다고 해도 은퇴 이후에는 진로가 불확실한 게 사실”이라며 “게임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고 해도 진로로서의 결정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