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가 23일 기습적으로 입법 예고하겠다고 밝힌 ‘집단소송법 제정안’ ‘상법 개정안’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온 이른바 ‘공정경제’의 결정판이다. 손경식 경총 회장은 이날 국회를 찾아 상법 개정안 등 국회에 계류 중인 기업 규제 관련 법안 처리를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와중에 정부가 직접 추가로 기업을 규제하는 법안을 낸 것이다.
법무부는 이번 법안을 작년 9월부터 민주당과 당정 협의를 통해 조율해 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법무부와의 협의는 민주당 정책위를 중심으로 일부 의원만 공유했다고 한다. 당 지도부에서도 이날 법무부의 입법 예고 사실을 모르는 의원이 많았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당 지도부 차원에서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 도입을 논의한 적은 아직 없다”고 했다. 비슷한 집단소송 관련 법을 발의해놓은 민주당 의원 측도 “법무부로부터 사전에 이번 입법 예고 발표와 관련해 연락받은 것은 없다”고 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번 상법 개정안 등과 관련, “과거 야당과 관련 업계의 반대로 번번이 폐기됐는데, (민주당이 176석을 차지한) 이번에야말로 법안을 통과시킬 기회”라고 했다.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 등은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됐던 것들이다. 문 대통령의 공약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던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를 뒷받침하며 임기 내내 추진해왔다. 이번 법안 추진은 지난 4·15 총선의 압도적 승리를 바탕으로 그간 청와대와 여권, 친여(親與) 시민단체들이 주장해왔던 ‘공정경제’의 틀을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완성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야권과 경제계에선 ‘공정경제’가 아니라 ‘기업 옥죄기’라며 반발하는 가운데, 현 정부가 임기를 불과 1년 7개월여 남기고 사회적 논란이 큰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작년 1월 공정경제 추진전략 회의에서 “공정경제를 위한 많은 법안들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라며 “기업 소유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그룹감독법 등과 소비자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 모두 공정경제를 확립하기 위한 시급한 법안들”이라고 했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관련해선 대선 후보 시절인 2017년 4월 중소기업인들을 만나 “3배 가지고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기 쉽지 않다”며 ‘최대 10배’까지 강화하겠다고 했다. 2018년 12월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확대하는 등 불공정 거래 관행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다.
2017년 6월 문재인 정부 초대 공정거래위원장이 된 김상조 실장은 취임 직후부터 집단소송제 도입을 추진했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관련해서도 “반사회적이고 고의적인 위법 행위는 선별해서 10배로 부과하는 방법도 가능하다”면서 강화·확대를 추진했다. 이른바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개정안)’은 과거 교수 시절부터 재벌 개혁 등을 앞장서 강조해온 ‘김상조표 법안’이란 말도 나온다. 참여연대 출신인 김 실장은 문재인 대선 캠프에서 재벌 개혁 공약 등을 비롯한 포괄적 경제정책인 ‘J(문재인)노믹스’를 설계했다. 특히 올해 4·15 총선이 여당 압승으로 끝난 뒤 지난 6월 정부의 금융그룹감독법 입법 예고 등 김상조표 정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일반 기업뿐만 아니라 언론사 등에도 적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확대는 최근 여권 인사들이 앞장서 주장해온 것이기도 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언론사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찬성 81%’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이를 강하게 주장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언론 인터뷰에서 언론 관련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 “정치권을 중심으로 발의된 법안들은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인터뷰에서 “어떤 언론은 정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면서 “정파적인 관점이 앞서면서 진실이 뒷전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