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중공업, 화학 등 중화학공업은 한국 경제의 뿌리이자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주력 산업이다. 하지만 이 산업들은 최근 복합 위기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퍼펙트 스톰(여러 요인이 동시에 발생해 예기치 않은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상황에 직면해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세, 글로벌 공급 과잉,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 및 탄소 중립 규제 강화 등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내적으로도 내수 부진,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 강화되는 환경 규제 등으로 인해 주요 기업들이 설비 폐쇄와 가동 중단을 선언하고, 수익성 역시 크게 악화되고 있다.
이들 산업의 위기 돌파는 단순히 기업의 생존을 넘어 국가 경제와 산업 생태계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과제다. 국내 주요 기업들도 위기 속에서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한 초격차 기술력 확보,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 등 정공법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초격차 기술력으로 위기 돌파
한국 대표 철강 기업인 포스코는 고부가가치 철강재 ‘기가스틸’ ‘고망간강’ 등 고유의 철강 기술력을 필두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고 있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50%로 인상하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친 가운데 핵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고망간강은 철에 다량의 망간을 첨가해 영하 196도의 극저온에서도 우수한 기계적 특성을 나타낸다. 지난 5월에는 고망간강을 함정 선체에 최초로 적용하기 위한 업무 협약을 HD현대중공업과 체결하는 등 사용처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은 “그룹 경쟁력 핵심은 기술의 절대적 우위 확보이며 이를 통해 미래 시장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 에너지, 기계·로봇 분야를 주력으로 하는 HD현대는 ‘영원한 호황은 없다’는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중장기 기술 확보와 미래 경쟁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 HD현대는 중국의 급격한 성장세에 맞서 ‘초격차 기술력’을 생존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 결과 액화천연가스(LNG), 메탄올, 암모니아 등 친환경 선박 기술을 바탕으로 향후 3년 이상의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더불어 SMR(소형모듈원자로) 추진 선박, 수소연료전지 등 미래 원천 기술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내년 창립 130주년을 앞둔 두산그룹은 AI(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에너지 분야를 주목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청정 전기 생산을 위한 가스터빈과 대형 원전, SMR(소형모듈원전)을 비롯해 수소 터빈, 해상 풍력 등 다양한 발전 주(主)기기 부문에서 공급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세계 다섯 번째로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개발에 성공하는 등 기술력을 바탕으로 위기 돌파에 나선 것이다. 두산은 차세대 에너지 자원인 수소 분야에서도 생산부터 유통, 활용에 이르는 밸류체인(가치사슬)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화학, 중공업 등이 주력인 효성은 글로벌 경기 침체, 경쟁 업체의 견제 등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신시장을 개척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미국과 유럽의 변압기 시장을 중심으로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산, 송배전망 교체, 신재생에너지 투자 증가로 대형 변압기(LPT)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영국 초고압 변압기 시장 점유율 1위로 독일, 프랑스의 송전업체와도 잇따라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저탄소 신사업’ 등 새 성장 동력 발굴
SK그룹의 에너지 분야 핵심 기업인 SK이노베이션은 석유화학 분야 침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쟁력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핵심 역할을 하는 기업은 SK이노베이션의 100% 자회사인 SK지오센트릭이다.
SK지오센트릭은 1972년 국내 최초로 나프타 분해 설비를 가동한 이후,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신기술을 하나하나 늘려 왔다. 기초 유화 사업을 기반으로 촉매 및 제품 기술을 고도화해 경쟁력을 갖췄고 최근에는 반도체용 케미컬과 포장 소재 등 신사업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SK지오센트릭은 차별화된 고부가 화학 제품인 에틸렌 아크릴산(EAA)을 중심으로 수익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GS칼텍스는 불확실성이 높은 경영 환경에서 CCUS(탄소 포집·활용·저장), 무탄소 스팀, 바이오 연료, 폐플라스틱 리사이클링 사업 등 ‘저탄소 신사업’을 중심으로 위기 돌파에 나서고 있다. 국내 최대 정유·석유화학 단지 중 하나인 여수 산단에서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대규모 CCUS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글로벌 연료 시장 환경 변화에 맞춰 바이오 항공유(SAF), 바이오 선박유 등 차세대 바이오 연료 투자도 집중 확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