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매사 철두철미한 친구 J에겐 '361 룰'이 있다. 항공권은 출발 361일 전부터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수년째 실천한 룰이다. 적어도 1년 전 여름·겨울 휴가 일정을 미리 정한 뒤 출발 361일 전 알람을 맞춰 놓고 항공권을 산다. 이 룰이 코로나 때문에 깨졌다. 계획대로라면 J의 네 식구는 지금쯤 괌에 있어야 했지만 눈물 머금고 취소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 먹다 체한 격이 됐다.

J 말고도 여름 해외휴가를 접은 사람이 주변에 여럿이다. 설상가상, 차선책으로 택한 국내 휴가를 물폭탄급 장마 때문에 날린 지인도 적잖다.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travel(트래블)'이 고생·고역을 의미하는 고대 프랑스어 'travail'에서 왔다는 얘기가 요즘처럼 와 닿을 때가 없다. 이 말이 등장했다는 14세기에 고역은 이동 수단의 한계 때문이었지만, 2020년 여름의 고역은 바이러스와 이상기후가 몰고 왔다는 점이 다를 뿐.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정의했듯 인류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여행하는 인간)'다. 특히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30년간 압축적으로 여행의 맛에 중독된 한국형 호모 비아토르들은 그 달콤함을 쉬이 잊을 수 없다. 2019년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 수는 연인원 2871만여명. 후끈 달아오른 여행 본능이 한순간 꺾이진 않는다. 어릴 때부터 부모 손잡고 해외여행을 밥 먹듯 한 20대 '트래블 네이티브(travel native·천생 여행꾼)'도 좀이 쑤신다. 그리하여 차 안에서 새우잠 자는 수고도 감수하겠다는 '차박(자동차 숙박)'으로, 돈 좀 쓰더라도 호텔에서 1박이라도 하겠다는 '호캉스(호텔 바캉스)'로 국내 여행족들이 넘쳐 난다.

사회적 거리 두기 원칙을 잘 지킨다면,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그사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여행객들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고 안간힘 쓴 지자체들엔 이런 호기가 없지 않은가. 일부 지자체에선 들떠서 '언택트 인기 휴가지 급부상'식으로 홍보 자료를 쏟아내는데 그럴 때가 아니다. 여행자들의 요구를 잘 파악해 인프라 개선을 하지 않으면 일회성 반짝 특수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파리 뒷골목에 숨어 있는 미슐랭 맛집까지 찾아가고, 스위스로 트레킹 가는 여행 빠꼼이들의 귀환이다. 마음을 사려면 정교한 상품이 필요하다. 여행업계 얘기를 들어보면 올여름 국내 휴가객들의 예산은 과거에 비해 두둑한 편이라고 한다. 해외여행용 예산을 국내 여행으로 돌린 데다 여행의 최우선 키워드가 '안전'이 되면서 고급 숙소를 선호하기 때문이란다.

바가지요금 씌우란 얘기가 아니다. '이유 있는 고가(高價)'에 지갑 열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이다.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 이동건 대표는 "취향, 체험을 중시하는 최근 해외여행 패턴이 고스란히 국내 여행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마늘 철이면 '마늘 축제', 사과 철이면 '사과 축제'식으로 지자체가 공급자 중심으로 만든 상품은 매력이 떨어진다. '값이 비싸도 아깝지 않은 경험'을 주는 수요자 중심 상품이 많아져야 한다. 돈 써도 그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여행이어야 한다.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야 하는 시대에 걸맞게 제도적으로 유연한 취소·환불이 가능케 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교한 양질의 국내 여행 상품 개발은 장기적으로 코로나 이후 외국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방역으로 안전한 나라임을 입증받은 상태에서 고품질 국내 상품이 더해지면 그동안 인바운드 여행(외국인의 국내 여행)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저가 패키지 여행, 서울 편중을 자연스럽게 완화할 수도 있다. 훗날 2020년 코로나 속 여름이 우리 땅의 멋스러움을 재발견하고 우리 볼거리를 승격시킨 변곡점으로 기억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