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구세대 디자인 전문가라면 '일본 현대 디자인엔 일본적 색채가 분명한데, 한국 현대 디자인엔 한국적 색채가 분명하지 않다'는 힐난을 들어봤기 마련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한글 타이포그래피 실험을 통해 체면을 세우고자 했고, 건축계는 지역화한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의 지역주의를 추구하면서 나름의 방어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국내 디자인 분야에서 피상적 모티프 이상으로 한국성을 구현하는 일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이후 한국 사회 전반이 대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 덕인지, '일본적 디자인에 상응하는 한국적 디자인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주문을 듣기 어려워졌다. 대신, 한류의 성공에 빗대 '디자인 한류'를 기대하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데 '디자인 한류'를 이야기할 때마다 다시 '한국성을 구현한 디자인'에 대한 관습적 호평(별로 진심인 것 같지도 않지만)이 재발한다.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강박 아닌 강박을 이해하려면 일본적 현대 디자인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일본의 디자인은 화양절충(和洋折衷) 이상의 일본성을 구현하게 됐을까?
메이지 초기에 공업의 반대편에 놓였던 일본 특유의 미술공예(kunstgewerbe·미술공예운동의 오스트리아 버전)적 미술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다루는 국가사회적 책무를 떠안았다. 하지만 패전 일본의 미술은 그런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성전화(聖戰畵)를 그렸던 화가들의 발언권은 말소됐으며, '핍진성 추구를 통한 존재 의미 획득'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적 리얼리즘은 갑자기 개인의 것으로 치환돼야 했다. 따라서 재건기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든 야마토 민족의 정신을 우회 계승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은 미술 밖 인접 분야에 가해졌다.
일본인의 정신을 구현한 디자인의 시조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 야나기 소리였다. 1950년대에 두각을 나타냈던 야나기 소리는 아시아 민예품의 수집을 통해 아시아 공통의 조형 언어를 찾고, 그를 바탕으로 범아시아 미술공예운동을 전개하려 했던 부친의 꿈을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문화적 참조 대상을 일본열도 내의 것으로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디자인계가 독창성을 추구하게 된 것은 1957년 굿디자인 제도 출범 이후인데, 배후엔 통상 마찰로 인한 외교 갈등이 있었다. 일본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통제 아래 있던 1949년 영국 정부는 "일본의 기업들이 영국의 제품을 부적절하게 전유한 섬유 제품을 수출한다"고 공식 항의했다. 즉, 디자인계는 수출 상품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고, 자국 디자인 문법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1958년 소니사가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TR-610으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문화사적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본산업계는 디자인 표절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엘리트 프로그램이었던 일본의 굿디자인 제도는 출범 7년째 되던 1963년, 즉 도쿄올림픽을 1년 앞두고 폐쇄적 심사 구조를 개방형 참여 제도로 전환했다. 디자인으로 제조업을 강화해낼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엘리트 사회는,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의 프로파간다, '과학기술 혁명을 통해 산업사회는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거치지 않고도 모두가 번영하는 유토피아에 도달하게 된다'는 비전과 약속을 메이드 인 재팬 버전으로 업데이트해냈다. 이후 일본 사회는 진보사상과 예술을 멀리하며 보수화했다.
일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주의적 미래상이 제시됐으니, 그에 부합하는 일본적 디자인의 진일보도 가능했다. 그래픽 디자이너 요코오 다다노리는 197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인전을 열며 일본의 앤디 워홀로 명성을 떨쳤고,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는 1973년 파리 컬렉션에 데뷔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하면, 대한민국의 디자인은 왜 피상적 차원의 한국성 탐구와 구현에 머무르고 말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실하게 그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후 한국의 현대미술은 문학과 짝을 이루며, 거침없이 현대화한 한국성과 민중주의적 한국성을 연이어 탐구하고 시각화했기 때문에 여타 인접 분야에 가해지는 압력은 미약했다. 정신적 차원의 실존을 조형하는 일을 제1 과제로 삼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한국 디자이너들은 실용적 절충의 방식을 통해 보편성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 점은 과거에 비판받았으나, 오늘의 상황에선 오히려 장점으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