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당시 서울대 문리대 2학년이었던 나는 시위 학생들 속에 있었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많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숨졌다. 내게 이승만은 독재자고 학살자였지만…."

원로 언론인 인보길 선생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는데, 두 시간 넘게 계속될 열변(熱辯)의 시작이었다. 그는 여든의 나이에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을 출간했다.

"세간에 일반화된 이승만 인식은 모두 반대 세력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승만에 대해 객관적인 접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독재자로 낙인찍어 그 실체를 완전히 매장시킨 역사의 무덤을 내가 파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얼마 전 인사청문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國父)라는 주장에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고 국부는 김구가 됐어야 했다'고 답변했는데?

"해방 공간(1945~1948)에서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했던 소련의 스탈린이 짜놓은 프레임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미국의 꼭두각시'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과 그의 집권 시기에 대해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건국의 반대편에 섰던 金九

―국부(國父)란 '대한민국 건립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김구는 항일운동가·임정 주석·민족 지도자는 맞지만 건국의 반대편에 섰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막으려고 김일성과 협상하러 평양에 갔다. 결정적 순간에 김일성의 술수에 말려들었던 셈인데?

"해방 직후 한반도의 중심 인물은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미국이 '남북 좌우 합작 정부'를 추진하려고 할 때,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이에 올라타 한반도 공산화 계획을 세웠다. 연립정부를 통해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시킨 전략전술이었다. 당시 스탈린이 평양의 소련 군정 사령부에 지령을 내린 '김구 포섭 공작' 문건도 있다."

인보길 선생은 “일반화된 이승만 인식은 반대 세력의 관점에서 다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는 상해 임정 시절 계급혁명 노선인 공산주의 계열과 싸워왔는데?

"김구는 1947년 출간한 백범일지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계급 독재'라고 했지만, 남북한 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단이 오자 김일성과의 연립정부 카드를 꺼냈다. 당시 이승만이 중심을 잡지 않았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건국 후 이승만이 본격적으로 '독재자 낙인'이 찍히는 집권 시기(1952~1954년)를 다뤘는데?

"학계에서는 이승만 집권 시기에 대해 '독재자' 프레임에 봉사하는 논문만 써왔다. 우리 지식인들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연구는 외면했다. 그래서 내가 작심하고 썼다."

―이 시기에 있었던 '부산 정치 파동' '사사오입 개헌' 등을 '이승만의 제2 건국 투쟁'으로 재해석했다.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해방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를 세운 것이 '이승만의 1차 건국 투쟁'이었다. 부랴부랴 건국은 해놓았지만 미완의 상태였다.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도 거의 혼자서 국내외 적들과 싸우며 대통령 직선제·한미 안보동맹·자유시장경제를 채워넣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 대한민국이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6·25전쟁 중인 1952년 계엄령을 발동해 개헌을 밀어붙인 '부산 정치 파동'은 이승만 독재의 시발점으로 기록되는데?

"부산 정치 파동이란 정확하게 말하면 '대통령 직선제 개헌' 혹은 '직선제 개헌 파동'이었다. 대통령을 국회가 선출하는 간접선거제에서 국민 직접투표로 뽑도록 헌법을 바꾼 것이다."

―이승만은 당초 제헌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대통령에 선출됐다(1948년 7월 20일).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한민당의 표결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왜 4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려고 했나?

"이승만을 옹립했던 한민당은 조각(組閣) 과정에서 총리를 포함해 7명의 입각을 요구했다. '한민당 정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거부하자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섰다. 이런 야당과 미국의 이해가 일치했다. 미국은 '휴전 반대'를 고집하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자기 말 잘 듣는 권력자'를 세우고 싶어 했다. 이때 이승만이 던진 카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승만은 계엄령 발동으로 의원들을 압박해 개헌에 성공했다. 전쟁 와중에 내부 권력 투쟁을 벌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는데?

"그런 비판이 있겠지만, 개헌안 통과로 실질적인 주권재민(主權在民)이 이뤄졌다. 이승만은 '국민 직선제를 이뤄낸 부산 정치 파동은 무혈(無血)혁명'이라고 했다."

―원내 지지 세력이 거의 없었던 이승만은 그 무렵 '자유당'을 창당했는데?

"이승만은 '국회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한민당 세력)은 다 양반 아니냐, 나는 상놈당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농민의 정당을 생각했다. 당명으로 처음에는 '통일노농당'도 거론됐지만 '자유당'이 채택됐다."

―지금 잣대에서 보면 진보 좌파 정당과 유사하다.

"그때는 강대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반 사대주의'의 극복이 절실했다. 이승만은 평생 '똑똑한 국민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국민이 똑똑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지, 안 그러면 공산주의의 제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구 집권의 유혹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최초의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는데?

"이승만은 당선 소감에서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매양 남과 싸우지 않고는 될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정치 세력뿐만 아니라 휴전을 서두르는 미국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미국은 휴전 반대와 북진 통일을 밀어붙이는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특히 반공포로 석방으로 이승만은 국제사회의 공적(公敵)이 됐다."

―미국은 유엔 명의로 계엄령을 선포해 이승만을 감금한 뒤 군정을 실시하려는 '에버레디(Everready) 플랜'을 검토했는데?

"미국은 현실적 부담 때문에 그 계획을 중단했다. 이승만은 이런 미국에 맞서 한·미 동맹과 경제원조를 얻어냈다. 자유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한 개인의 신념과 외교 전략에서 이뤄진 측면이 컸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된 날, 휴전 반대로 미국과 불화를 빚어온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성명서를 내놓았다.

'공산 측이 전쟁과 파괴적 행동을 준비해 더욱 공격하게 될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해왔던 것이다.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그동안 내 판단과 예측이 옳지 않은 것으로 되었으면 좋겠다. 공산 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성명서를 읽어보면 이승만은 탁월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국제 감각과 식견을 가졌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의 자문역을 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은 신화 속 인물'이라고 했다. 밴플리트 당시 미8군 사령관은 미 청문회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몸무게만큼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1954년 초대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했다. 독재 왕정처럼 종신 대통령의 길을 열었는데?

"개헌안 부칙의 '초대 대통령은 임기 제한에 적용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이 개헌안의 본질은 제헌헌법의 경제 조항을 전면 개정하는 것이었다."

―개헌은 재적 의원 3분의 2인 136명 찬성이 있어야 했지만 찬성표 한 표가 모자랐다. 이승만 정권은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니 사사오입해 135명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절차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절차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개헌안은 미국 경제원조 10억달러가 들어오는 시점에 맞춘 경제 부흥 목적이었다. 제헌헌법에는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식의 '국유화' '공유화' 같은 통제 규정이 들어있었다. 민간기업에 대해서도 '공익성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해놓았다. 개헌안은 이런 규정을 빼고 자유 시장경제 조항으로 바꿨다. 당시 정치인, 언론, 학생이 경제 조항 개정에 다 반대했지만, 개헌안은 그 뒤 이 땅에 자유 시장경제를 뿌리내리게 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이승만은 왜 영구 집권의 유혹을 받았을까?

"당시는 휴전이 된 지 1년밖에 안 됐다. 북한에는 여전히 중공군 10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전쟁이 재개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안보 조약과 원조 자금을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봤을 것이다. 당시 변영태 총리는 '이승만이 물러나면 수십 명의 우익 후보가 출마해 표 분할이 될 것이고, 이럴 경우 공산주의를 숨긴 좌익 후보가 당선될 게 뻔하다'고 말했다."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이승만이 권력욕에 대한 절제가 있었으면 결코 4·19를 맞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4·19 때 학생들이 뛰쳐나온 것은 자유당의 횡포와 부정선거로 민주 체제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수호하려던 헌정 체제는 바로 이승만이 만든 것이다. 이승만은 부상 학생들이 입원한 서울대 부속병원을 찾아와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했다."

―일주일 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승만은 스스로 사퇴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자유민주 체제를 지켜냈던 것이다. 그는 장제스 대만 총통의 위로 전문에 '나는 위로받을 이유가 한 가지도 없소. 불의를 보고 일어서는 똑똑한 젊은이들과 국민을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라는 답신을 보냈다."

인보길 선생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여든의 나이에 청년 같은 용기로 이 책을 썼다는 게 놀랍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참모, 여야 정치인들이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