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태어난 소년은, 기억조차 희미한 시절부터 축구공과 함께했다. 골키퍼 자리를 즐겨 맡았던 그는 고향 연고팀인 피오렌티나를 거쳐 15살 되던 해 인터밀란 유스에 입단했다. 인터밀란 깃발 아래에 선 소년은 영원토록 축구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래전의 아피아노 젠틸레(인터밀란 훈련장)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의 축구는 그곳에서 조금 바뀌었다. 축구는 내게 평생의 꿈이며 열정이 됐다.”
그러나 톰마소 베르니(37)의 재능은 그의 열망을 따라잡지 못했다. 나날이 성장하는 몸에 비해 역량은 더디 자랐다. U-15부터 U-21까지 대부분 연령대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리고도 정작 성인 대표팀 합류엔 실패했다. 2001년엔 18세 나이로 인터밀란 1군에 데뷔했지만 불과 1년 만에 잉글랜드 2부 리그 팀이던 윔블던 FC로 밀려났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몸담았던 세리에B(이탈리아 2부 리그) 테르나나에선 그나마 87회 출전하며 나름 준수한 활약을 했다. 하지만 2006년 세리에A(1부 리그) 라치오에 입성해서는 5시즌을 뛰면서도 8회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2009년 한 해 동안 임대를 다녀온 세리에B 살레르니타나에서도 그라운드에 나선 횟수는 16차례에 그쳤다. 2011~2012년에 옮겨간 포르투갈 브라가에서도 한 차례 출전에 만족해야 했으며, 2012~2014년엔 세리에B였던 삼프도리아에 들어가 승격 멤버에 이름을 올렸지만 정작 그가 이 팀에서 2년간 출전한 경기는 3개뿐이었다. 이 시기까지 베르니의 프로 커리어 12년을 통틀어 그가 골문을 지킨 경기는 110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슬픔은 2013년부터 시작됐다. 그 해 이적한 세리에A 토리노에서 베르니는 내내 벤치에 머물렀다. 다음해에 돌아간 친정 인터밀란에서도 그는 여태껏 그라운드를 밟은 역사가 없다. 소속 팀도 있는 엄연한 프로 선수가 무려 7년간을 경기에 한 차례도 나서지 못한 것이다.
베르니는 그 와중에 퇴장만 2번을 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는 지난 1월 26일 칼리아리와의 홈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 5분에 동료 공격수 라우타로 마르티네스(23·인터밀란·아르헨티나)가 석연치 않은 퇴장 판정을 받자, 벤치에서 나서며 심판을 조롱하는 투로 손뼉을 치다 덩달아 레드카드를 받았다. 베르니는 5개월 뒤인 6월 29일에도 파르마와의 원정경기에서 후보 선수로 대기하던 중 후반 23분에 심판 판정에 과도한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퇴장 조치를 당했다.
영국 매체 기브미스포츠에 따르면 베르니의 연봉은 20만 유로(약 2억7000만원)에 달한다. 이 매체는 “6년 동안 단 한 경기도 소화하지 않고 레드카드만 2개 받으면서 20만 유로를 버는 것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그저 흥겹기만 했으리라 단정해 말하긴 어렵다. 필드를 누비지 못하는 선수가 직업인으로서 늘 마음 편히 지내긴 아무래도 어렵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축구는 하고 싶지 않았다”며 13년간 꾀병을 부린 끝에 결국 단 한 경기도 나서지 않은 브라질 출신 스트라이커 카를로스 카이저(57)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선수라면 하염없이 벤치나 데우는 나날이 조금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평생에 걸친 꿈의 첫걸음을 뗀 친정으로 돌아왔건만, 골키퍼로서는 한창일 31~37세 시절에 아무 활약도 하지 못했다면 더욱이나 그러할 것이다.
실제로 프로축구 K리그 수원 삼성에서 1998년부터 2011년까지 뛰었음에도 이운재(47)에 밀려 나선 경기가 76개에 불과했던 김대환(44)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골키퍼 코치)도 “나는 10년간 벤치에 앉아 있으며 경기를 뛰지 못하는 슬픔을 많이 느꼈다”며 “주전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실력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만, 반대로 벤치에 있는 선수들은 역량을 의심받게 된다. 골키퍼 포지션은 특히 그렇다”고 말한 바가 있다.
다행히도 베르니는 다른 방면에서 인터밀란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았다. 인터밀란 관계자는 “베르니는 항상 성실히 훈련에 임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2014 년 이후 클럽은 코치를 임명할 때 모두 베르니를 기준으로 삼아 뽑았다”고 했다. 그가 유럽 최고 수준 리그 선수치고는 몸값이 매우 싼 편이긴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인터밀란이 베르니를 데리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베르니를 그라운드에 세운 적이 전혀 없었고, 사미르 한다노비치(36·슬로베니아)와 다니엘레 파델리(35·이탈리아)가 건재한 만큼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럴 일이 없을 텐데도, 인터밀란은 올해 7월까지였던 그와의 계약을 2개월 추가 연장했다. 인터밀란 소식지에서는 그를 “한 경기도 뛰지 않았지만 라커룸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평했다.
베르니 역시 자신의 특수한 역할에 사명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는 “내가 자연스레 팀을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팀이 어려운 때에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린 선수가 나와는 다른 길을 걷도록 안내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연장된 계약도 오는 8월 말이면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베르니는 한동안 인터밀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내려놓지 않을 듯하다. 인터밀란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체 SempreInter는 최근 “인터밀란이 베르니에게 코치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