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한 사과농장에선 이른 아침부터 사과 열매솎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모양이 예쁘지 않거나 흠집이 있는 열매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해마다 3월쯤 시작해 9월이면 끝나는 사과 농사는 이맘때가 가장 바쁘다. 농장 대표 김성식(59)씨는 "벼농사로 치면 모판을 만들고 모내기를 하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 농장은 사과의 단맛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미노산, 효모 등 12가지 성분을 넣고 1주일 정도 숙성시킨 영양제를 사과나무에 먹인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지난 2012년 장수로 귀농해 8300㎡(약 2500평) 사과농장을 일구는 김 대표는 "장수는 사과농사에 최적"이라고 했다.
평균 해발이 500m인 장수군은 전체 면적(533.53㎢)의 75%가 산악 지형이다. 농경지는 15%에 불과하다. 장수군은 상대적으로 좁은 땅에서 빨간 농축산물을 집중적으로 기르는 전략을 택했다. 이른바 '레드 푸드(Red Food)' 사업이다. 핵심은 사과다. 이 외에도 오미자·토마토·한우를 지역 경제의 활력으로 삼고 있다.
장수는 사과를 키우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사과 열매가 익어가는 6~8월 평균기온이 22도로 최적 온도 18~24도에 딱 들어맞는다. 과실 성숙기인 9~10월 평균기온은 15.1도인데, 이때 일교차가 크게 나면서 당도가 높아진다. 물이 많다는 뜻의 지역명 장수(長水)처럼 농업용수도 풍부하다. 최근 5년간 연평균 강수량이 1654㎜다. 금강 물길의 발원지인 뜬봉샘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장수 곳곳을 적시고 군산 앞바다까지 394.79㎞를 흐른다.
장수에선 사과 품종 중 주로 홍로(紅露)를 생산한다. 전체 사과 재배면적(1057만㎡)의 58%(617만㎡)가 홍로 재배지다. 지난해 장수의 홍로 생산량은 1만6000t(전국 생산량의 23%)으로 전국 1위다. 작년에 사과 가격이 폭락했는데도 농가 904곳에서 매출 220억원을 올렸다. 지난 2016년엔 농가 1가구당 소득 7600여만원을 올렸다. 김경용 장수군 농업정책과 농축산 유통팀장은 "장수는 산간 고랭지에 있어 공해가 없고 병충해 발생이 적다"며 "농약을 적게 쓰는 친환경 농법을 사용해 국내 홍로 중에서 가장 질 좋은 상품이 나온다"고 말했다.
장수군은 사과 생산에 그치지 않고 가공업체도 육성한다. 사과로 잼·조청·과자·식초 등을 만드는 업체는 지난 2016년 5곳(매출액 6억7400만원)에서 지난해 17곳까지 늘어 14억42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츠레드'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사과를 중심으로 오미자·토마토 등 장수에서 나는 붉은 농산물을 이츠레드 상품으로 키운다. 브랜드 출시 첫해인 지난 2018년엔 매출 1015만원에 그쳤지만, 지난해엔 6289만원으로 6배 증가했다. 노익선 장수 농촌 융복합 산업지원센터장은 "장수에서 난 신선한 농·특산물을 도시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해 인구가 많은 전주에 226㎡ 규모의 직매장을 열고 이츠레드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며 "올해는 코로나 여파가 있지만 재난지원금 등이 풀리면서 매출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과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관광상품도 된다. 지역 농가에서 기르는 사과나무를 도시민에게 분양하는 '장수사과 사이버팜'이 대표적이다. 매해 1월부터 6월 말까지 장수사과 시험장(063-351-1344)을 통해 접수한다. 실제 재배는 농민이 맡지만, 사과나무 한 그루를 분양(10만원)받는 사람은 사과꽃 따기, 거름 주기, 수확 같은 재배 체험을 할 수 있다. 장수사과 사이버팜 홈페이지(www. myapple.go.kr)에서 자신의 사과가 자라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수확 시기인 9월엔 사과 30㎏을 받는다. 직접 방문하면 한 그루에 40~50㎏ 정도 나오는 사과를 다 따갈 수 있다.
매해 9~10월에 열리는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는 지난해 태풍 링링의 여파로 열리지 않았지만, 지난 2018년엔 관광객 34만여 명이 다녀갔다. 당시 관광객들이 쓰고 간 돈은 112억원으로 조사됐다. 올해는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지난 2016년 6월 장수군 장계면에 문을 연 '장수 레드 푸드 센터'에도 개관 6개월 만에 10만여 명이 다녀가며 사과 관광 거점으로 떠올랐다.
장수군에 사과 산업 인프라가 잘 갖춰지자 귀농·귀촌을 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1611가구(2221명)가 장수로 귀농·귀촌을 했다. 장수군은 '귀농인 게스트하우스'를 제공하고 주택구입 자금, 집 수리비 등을 지원한다. 장영수 장수군수는 "장수 사과는 뛰어난 품질로 사랑받고 있다"며 "사과 수출 전문생산단지 육성, 장기 저장 시스템 구축 등으로 사과 가격을 안정화하고 농가 소득을 늘리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