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일 수 없다. 가까이서 대화하는 건 더 안된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여전히 휘둘리고 있는 일본은 ‘생활 방역’으로 진입한 한국과 달리 ‘외출 자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출연자와 제작진이 현장에서 호흡을 맞춰야 하는 공연 예술계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를 이어왔다.

하지만 최근 연극계를 중심으로 ‘굳이 다 같이 모일 필요가 없다면?’이란 생각을 활용해 이런 고난을 이겨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화상 대화 시스템이나 다자간 영상 통화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연기하고 관객에게 선보이는 ‘랜선 공연’ 방식으로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도 온라인 공연은 있었지만, 이미 촬영된 기존의 공연 영상을 온라인에 한 번에 배포하는 수준이었다. 새로 등장한 ‘원격 연극’ ‘원격 영화’는 캐스팅, 연출, 연기, 관람까지 전 단계가 원격으로 이뤄진다. 연극의 경우 배우들이 각자의 방에서 단체 화상 회의창에 접속해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식이다. 코로나 시대가 빚어낸 신풍경이다.

지난달 일본의 원격 연극단 '텔레워크'가 치른 오디션 속 공연 '위험한 놈'의 한 장면. 위 남녀가 대화하는 도중 제3자(아래)가 끼어들어 벌어지는 일을 다룬 단편 연극이다.

화상 공연이 처음 가능성을 보인 건 지난달 초였다. 한 영상 콘텐츠 업체에서 워크숍 겸 공개 오디션을 개최하면서 시범적으로 단편 화상 연극 몇편을 촬영해 온라인에 공개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고무된 업체 측은 화상 대화 시스템으로 연극을 기획하고 연습·공연까지 하는 신형 극단 ‘텔레워크(재택근무)’를 창단했다. 이 소식에 자극받은 다른 업체에서도 노미츠(no meets)란 극단을 만들었다.

모든 제작 인원이 원격으로 일하는 만큼 연극 소재는 화상 대화와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극단 텔레워크의 창단 계기가 됐던 오디션 속 화제작 ‘위험한 놈’이란 연극은 남녀가 양자간 화상 통화를 하는 도중에 제3자 남성이 대화방에 끼어들어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한다. 극단 노미츠의 첫 작품 ‘줌(zoom·화상 대화 시스템 중 하나) 회식 중 괴기 현상 일어난다’는 연극도 마찬가지다. 원격 회식을 하던 주인공들 방 안이 흔들리고 벽에 걸린 옷이 떨어진다. 몇몇은 공포영화 속 피해자처럼 쓰러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극단 '노미츠' 소속 배우들이 연기한 연극 '답답한 상사와의 회의를 피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중 한 장면. 왼쪽 위가 상사, 아래 두 명은 가짜 화면을 틀어놨다가 걸린 직원들이다. 상사는 오른쪽 상단 직원에게도 "가짜 화면을 거두고 실제로 나와"라고 소리쳤는데, 알고 보니 우측 위 직원은 꼼수 없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최고 히트작은 1분34초짜리 ‘답답한 상사와의 회의를 피하는 법을 생각했다’다. “코로나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자”며 화상 회의를 열어 아이디어를 독촉하는 상사의 말을 경청하는 듯 보였던 카메라 속 부하 직원들의 화면이 사실은 미리 촬영된 가짜 영상이었다는 게 들통난다. 상사는 뒤늦게 파자마와 속옷차림으로 카메라에 등장한 진짜 직원들을 보고 황당해 한다. 트위터에 연극이 공개된 후 2주도 안 돼 조회수가 980만회에 육박한다.

한 번 돌파구가 뚫리자 후발주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존에 오프라인에서 활동했던 극단이 온라인으로 영역을 임시 변경하기도 한다. 지난 6일에는 일본 유명 희극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이 유튜브 라이브로 공연됐다. 공간적 제약 때문에 배우들의 대사와 표정만 볼 수 있는 공연인데도 16만명이 관람했다.

원격 연극 '온라인 노미'의 9일, 10일자 공연 티켓 가격. 세금 포함 550엔이다.

랜선 공연도 돈이 된다. 인건비를 빼면 실제 제작비가 우리 돈으로 몇십만원 수준밖에 안 되기 때문에 손익분기점이 낮다고 한다. 연극 ‘온라인노미’ 제작진은 지난달 말 첫 공연에서 500엔(약 5700원)짜리 티켓 200장을 모두 팔았고, 현재는 가격을 550엔으로 올려 추가 공연을 하고 있다. 극단 텔레워크는 후불제를 선택해 온라인 관객이 관람 후 500엔부터 5000엔 사이의 티켓을 사도록 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관객 중 20% 정도가 돈을 냈는데 평균 티켓값은 800엔으로 집계됐다.

최근엔 영화계도 ‘원격 제작’에 가세했다. 지난 1일 일본 독립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8년 개봉)’의 스핀오프격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리모트(원격) 대작전’이 유튜브에 공개됐다. 이 영화도 제작자와 감독, 배우들이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제작됐다. 배우들이 직접 휴대폰 셀카모드로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감독인 우에다 신이치로는 지난달 3일 제작을 시작해 채 한 달도 안 돼 영화를 공개했는데, 원격 영화라 가능한 일이었다. 우에다 감독은 영화를 공개하면서 “소형 극장을 돕자”며 크라우드 펀딩을 열었는데 3일 만에 목표치인 1억엔을 초과 달성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코로나 영향 때문에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제작자들이 많다. 이런 때에도 지혜와 노력 여하에 따라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새 일자리를 창출하고 싶었다”면서 “만날 수 없다는 장애 속에서 일상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아이디어와 작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