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국제기구에서 발을 빼는 틈을 활용해 중국은 지난 10년간 국제기구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 미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세계보건기구(WHO) 등 수많은 유엔(UN) 산하 기구가 중국 영향력에 휘둘리고 있고, 그 결과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유엔 산하 전문 기구 15곳 중 중국인이 수장을 맡고 있는 곳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4곳이다. 10년 전인 2010년 중국인은 마거릿 챈 WHO 사무총장 한 명뿐이었다. 더구나 챈은 홍콩 출신이었다.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주된 방법은 '돈'이다. WHO만 해도 최대 재정 분담국은 미국(22%)이지만, 중국 역시 12%를 부담해 미국 다음으로 돈을 많이 낸다. 중국의 1인당 GDP(9771달러·2018년)가 미국(6만2795달러)에 비해 크게 낮은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분담금이다.
중국은 국제기구에서 확대된 영향력을 자국 기업들의 이미지 개선에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 예가 중국 최대 감시소프트웨어 업체로 꼽히는 텐센트다. 텐센트의 화상회의 소프트웨어는 오는 9월 유엔 총회에서 사용된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 텐센트 이미지가 높아지는 것이다. 또 자오허우린(趙厚麟) ITU 사무총장은 중국 통신장비 회사인 화웨이가 5G 기술의 시장 확대를 하는 데 자신의 직(職)을 활용해 도와줬다는 의혹을 받았다.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지난해 4월 "중국 정부가 자국의 5G 기술을 세계 표준으로 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ITU 사무총장의 지원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아프리카 국가 등에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해주는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에 대한 홍보에도 국제기구가 활용된다. 유엔환경계획(UNEP) 홈페이지에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일대일로 수혜국이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기회가 된다"고 적혀 있다.
최근엔 견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실시된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사무총장 선거가 대표적이다. 당초 올해 9월부터 임기가 시작하는 차기 사무총장으로 중국 출신의 왕빈잉(王彬穎) 현 사무차장이 '0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미국의 견제로 다렌 탕 싱가포르 특허청장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