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 자택에서 만난 민충환 교수가 저서 수십 권을 번쩍 들고 "자식 같은 존재"라며 웃었다.

기승밥, 입쌀밥, 사잇밥, 중둥밥, 대궁….

하루 세끼 먹는 ‘밥’ 이름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벽초 홍명희 소설 ‘임꺽정’에는 밥 이름만 수두룩하게 나온다. ‘임꺽정 우리말 용례사전’을 낸 민충환(75) 전 부천대 교수는 “이 중 몇 개나 알고 계시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기승밥은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밥, 입쌀밥은 흰쌀밥이에요. 사잇밥은 끼니 밖에 참참이 먹는 음식이고, 중둥밥은 식은 밥에 물을 조금 치고 다시 무르게 끓인 밥, 대궁은 먹다 남은 밥…. 전부 처음 들어보죠?”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임꺽정’은 한국 근대 역사소설 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우리말의 보고이자 대해(大海)로 불릴 만큼 언어 표현이 빼어난 소설로 정평이 나 있다. 민 교수는 “이 소설의 성가(聲價)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으나 벽초가 월북 작가란 이유로 작품을 구할 수 없어 오랫동안 문학적 열등감에 시달렸다”며 “35년 전 드디어 책을 구한 날 밤새워 읽다가 소설 속 어휘가 외국어처럼 생소해 자괴감에 빠졌다”고 털어놓았다.

사전을 찾아가며 일일이 카드에 정리하다가 또 벽에 부딪혔다. 당시 우리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낱말이 대부분이었다. “1991년 남과 북에서 동시에 큰사전이 새로 발간되면서 덮어뒀던 과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10년 넘게 ‘임꺽정’을 탐독하면서 우리말의 풍부함에 새삼 놀랐다”고 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은 곧 서로 너나들이를 하였다”란 문장. 민 교수의 해설이다. “흔히 나이를 들먹이며 ‘어디다 반말이야?’ 하잖아요.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터놓고 지내는 사이’를 뜻하는 말이 ‘너나들이’예요.”

‘장기튀김’이라는 순우리말도 있다. 팻말이 연이어 넘어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외래어 ‘도미노’와 같은 뜻이다. “꺽정이가 그 사람의 손을 쥐고 돌아서서 한번 떠다밀었더니 그 사람은 고사하고 그 사람 뒤에 겹겹이 섰던 구경꾼이 장기튀김으로 자빠졌다.” ‘쌤통이다’라는 비속어 대신 ‘잘코사니’라는 단어는 어떨까. 소설에선 “금동이가 ‘이 자식이’ 하고 떠다밀어서 유복이가 쓰러지니 섭섭이가 이것을 보고 ‘아이코 잘코사니야’ 하고 방그레 웃었다”고 나온다.

작품 한 권에 의태어이면서 중첩어인 단어만 590개. “옴니암니 따질 것이 없이 피장파장해 버리세” “단풍이 곱다고 쉬고 곰배곰배 쉬여서 일백삼십 리 길을 사흘에도 해동갑하여 왔다”는 식이다. 겸두겸두(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아울러 함), 꾀송꾀송(달콤한 말로 남을 자꾸 꾀는 모양), 댕갈댕갈(맑고 고운 소리가 구르듯이 가볍게 잇달아 나는 모양)….

그는 “다양한 중첩어, 의태어를 시의적절하게 배치해 미묘한 어감도 잘 살리면서 인물들의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소설 ‘임꺽정’의 매력”이라고 했다. “식민지 시대,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려고 한 시기에 벽초는 일부러 이 어휘들을 집어넣어 쓴 겁니다. 문제는 그때만 해도 자연스럽게 읽고 썼을 단어들이 왜 지금의 우리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냐는 거죠. 안타까운 일이에요.”

민 교수는 문학 작품 속 우리말을 해석하는 일에 천착해왔다. “문학 평론은 자질이 부족했고, 문학 작품에 나오는 어휘는 국어학자들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방치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꺽정 사전을 만들면서 작가 사후에 그 특유의 소설어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했다. 북한에서 나온 토속어 사전도 참고했지만, 사전에 없는 고유의 표현들은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음 작업으로 ‘현역 작가’인 이문구를 선택했다. 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해석이 힘든 어휘를 골라 정리한 뒤 작가에게 두툼한 질문지를 보냈다. “그 바쁜 선생이 깨알같이 답을 보내왔어요. 평생 이 사람 작품만 연구하다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뒤로도 박완서, 김주영, 한승원, 정채봉, 송기숙 등 그의 손을 거쳐간 작가만 수십 명이다.

“지금 시중에 나와있는 사전에는 용례가 턱없이 부족해요. 특히 문학 작품 속 다양한 우리말이 풍부하게 들어있는 용례 사전이 필요한데, 저는 지금 그 밑작업을 하는 겁니다. 먼 훗날 누군가 만들 종합사전의 사초를 만드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