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찬 실리콘밸리 특파원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삼성전자 스마트폰 담당 사장의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행사 후 기자들이 명함을 건네자 사장은 "미처 명함을 못 가져왔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기자단이 모인 장소에 그가 다시 나타났다. "명함을 못 줘 마음이 불편했다"며 굳이 들러 명함을 나눠주고 갔다. 개인 연락처 없이 회사 주소, 사무실 번호만 적힌 '인사용 명함'이었다. 그래도 대부분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이 '명함 사회'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실리콘밸리는 명함에 꽤 인색하다. 한국에서는 명함을 준 만큼 상대방 명함도 똑같이 쌓이는데, 여기서는 내 명함만 빠르게 없어진다. "안 가져왔다"는 대답은 그나마 양반이고, 말없이 받기만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국인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생활을 오래한 한국인도 그렇다. 대신 이런 답이 돌아온다. "이메일 드릴게요." "링크트인(Linkedin·인맥관리 소셜미디어) 하시죠? 친구 추가할게요." 그래서 나는 이메일은 알지만, 링크트인 친구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휴대전화 번호는 모르는 지인(知人)을 꽤 갖게 됐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 명함을 잘 쓰지 않을까.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창업자, 테크 기업 엔지니어, 벤처 투자자 등 각계 사람들의 설명은 이렇다. 우선 사람들이 명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음식 서빙 로봇을 개발한 하정우 베어로보틱스 대표는 "업무상 명함이 필요한 직원에게만 만들어주는데 사실 파 달라고 하는 직원도 별로 없다"고 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없다. 현지 매체의 분석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15대 테크 기업의 직원 평균 재직 기간은 1.8~ 7.8년이다. 우버가 1.8년, 페이스북 2.5년, 알파벳(구글 모회사) 3.2년, 애플 5년, 시스코가 7.8년이다. 채용 인터뷰 일정을 최적화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문아련 굿타임 대표는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회사는 가차 없이 해고하고, 직원도 스스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사표를 내고 이직하는 곳이 실리콘밸리"라고 했다.

명함은 실용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명함에 담긴 정보는 상대의 이력 중 현재를 보여주는 점(點)과 같다. 실리콘밸리는 그보다 이 사람이 걸어온 선(線)을 더 중시한다. 스타트업 창업자에 투자할 때도, 경력 직원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명함 대신 링크트인이라는 소셜미디어가 널리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링크트인은 이용자 스스로 자신의 학력, 경력, 보유 기술, 봉사활동, 외국어 실력까지 세세하게 공개한 '온라인 이력서' 같은 곳이다.

연락처가 필요하면 "이메일이 뭐냐"고 묻지 명함을 달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곳의 주된 소통 수단은 전화·문자가 아닌 이메일이다. 메일만으로도 상대와 거의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에서 만날 때 "회사 로비에 도착했냐" "잘 도착했다" "지금 내려가겠다"는 단답형 대화를 이메일로 주고받은 적도 있다. 실리콘밸리 한 창업자는 "서로 한번 이메일을 트고 나면 굳이 전화번호 없이도 소통하는 데 별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테슬라의 한 엔지니어는 "한국은 소속 회사를 중요하게 보지만, 실리콘밸리는 회사보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회사 이름 크게 박힌 명함보다 개인이 걸어온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링크트인을 더 중시한다. 구글·애플과 같은 대기업을 박차고 작은 스타트업에 가는 것이 전혀 뉴스가 되지 않는다. '명함 사회'인 한국과 실리콘밸리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