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남으로 장복산이 보이는 아주 작은 산등성 마을이었다. 대부분 천수답으로 살기가 고단했던 탓인지 작은 다툼이 유난히 잦던 스무 남짓 가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빈촌 중의 빈촌이었다. 전기를 넣을 돈이 없어 창원공단 조성으로 마을이 철거됐던 1979년까지 호롱불로 생활했다.

동네 이름은 하나가 아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탓에 바람등, 황토흙이라 '붉다'의 일본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는 아까등, 바람 잦아 먼지가 많이 일어 미금등이라고도 했다. 흙먼지를 마창진 지역에서는 미금이라 했다. 할머니의 '미금 닦아라'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하다.

정월대보름날 달집을 태울 때 달집에서 연기가 많이 나면 풍년이 든다고 볏짚보다 연기를 많이 내는 생소나무를 많이 넣어 달집을 지었다. 미금등이라 불린 우리 마을은 장복산 등성이에 있어 생소나무를 어렵지 않게 산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기에 잘사는 평지의 큰 동네보다 우리 마을에서 만든 달집에서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을 어린 우리는 자랑스러워했다.

정월 대보름달을 먼저 보려고 초가지붕에 올라앉은 마을 사람들, 뜨는 달을 먼저 보고 먼저 달집에 불을 지르면 장가가서 아들 낳는다고 목을 길게 빼고 까치발로 다투던 모습들, 지금은 없어진 고향 미금등이 그립다. 나른한 봄날 말청(마루)에 누워 가만히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면 먼지는 마치 금가루처럼 반짝반짝했다. 이게 바로 미금이다. 금가루 같은 먼지 미금. 지금의 까맣게 닦이는 미세 먼지와는 격이 다른 청정 먼지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우리말 미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