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부 낙원동 300번지에 있는 장산사 사장 정세권씨가 화동 129번지에 있는 시가 4000여원 되는 이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

1935년 7월 13일 자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정세권(1888~1965)은 당시 경성에서 '건축왕'이라 불리며 잘나가던 인물. 현재의 북촌을 만든 부동산 개발업자로 그가 만든 한옥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부와 명성을 쌓은 그는 재산을 민족운동에 쏟아부었다. 특히 한글학자 이극로(1893~1978)와의 인연을 계기로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기증하는 등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발하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강탈당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쌀되와 조선어학회가 완간한 '큰사전', 밥공기와 수저 한 벌뿐이었다.

맨 왼쪽부터 안과의사 공병우가 언더우드 타자기를 개조해 만든 한글 세벌식 타자기, 한글 글꼴 원형인 최정호체 원도, 정세권이 남긴 ‘큰사전’, 박두성이 만든 한글 점자 ‘훈맹정음’.

국립한글박물관(관장 심동섭) 특별전 '한글의 큰 스승'은 세종대왕 말고도 한글을 지키고 빛낸 위대한 인물 12명을 소개한다. 박물관이 설문조사를 통해 '한글' 하면 떠오르는 사람을 물었더니 주시경·윤동주·허균·방정환·성삼문(집현전 학사)이 꼽혔고, 전문가와 학예사들이 '한글의 숨은 조력자' 7명을 선정했다. 한글 기계화와 정보화의 초석을 놓은 공병우, 1세대 글꼴 디자이너로 한글 글꼴의 원형을 만든 최정호, 한글 자모의 명칭과 순서의 효시가 된 '훈몽자회'를 집필한 최세진,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헐버트,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해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박두성, 조선시대 한글 조리서를 남긴 장계향, 북촌을 세운 건축왕 정세권이다. 한글로 섬세한 감정을 노래한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 정세권이 남긴 '큰사전' 등 195점을 12인의 스토리와 함께 펼쳐놓았다. 3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