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패망 75주년을 앞두고 폴란드와 러시아가 치열한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양국 정상까지 나서 서로를 "나치의 전쟁 범죄에 협력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발표한 성명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차 대전사(史)에 대해 수없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푸틴이 최근 러시아 국방부에 고위 장성들을 모아놓고 "유대인들을 아프리카 식민지로 추방한다는 히틀러의 아이디어에 나치 시절 독일 주재 폴란드 대사였던 유제프 립스키가 감격해 '바르샤바에 멋진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했다"며 "인간쓰레기이고 반유대주의 돼지"라고 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폴란드는 27일 자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고,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스탈린 전체주의 시대에서 온 선전·선동"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왜 죽은 지 반세기도 넘은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까지 불러내며 싸우는 걸까. 발단은 폴란드가 가입해 있는 유럽 의회가 지난 9월 '미래 세대를 위해 전체주의·공산주의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되새기자'며 채택한 결의안이었다. 이 결의안에는 '나치 독일과 소련이 1939년 체결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불가침조약)은 양국의 입맛대로 유럽과 독립 국가들의 영토를 쪼개 2차 대전 발발의 첫머리가 됐다'는 내용이 있다. 나치와 같은 수준으로 소련에도 2차 대전 발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푸틴은 결의안이 채택된 후로 줄곧 독소불가침조약은 "나치로부터 소련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며 화살을 영국·프랑스·폴란드 등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돌리고 있다.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때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본체만체한 것, 폴란드 일부 관리가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동조한 것 등을 들었다. '나치가 유럽을 잠식할 동안 너희는 뭐 잘한 거 있냐'는 논리다.
영국 BBC는 "2차 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했다는 점은 소련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에서 매우 중요한 근간"이라며 "푸틴은 자신의 정당성과 러시아를 소련 제국의 후예로 만들겠다는 확장주의적 외교정책의 명분을 여기서 찾았기 때문에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치군과 붉은 군대에 의해 나라가 두 개로 쪼개졌던 폴란드는 푸틴의 발언에 열을 낼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은 1939년 8월 소련과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중앙유럽 여러 국가를 독일과 소련이 각각 나눠 먹기로 한 비밀 의정서도 함께 만들었다. 폴란드 서부는 나치 독일이, 동부는 소련이 각각 갖기로 했다.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일주일 뒤 독일은 150만명을 동원해 폴란드를 서쪽으로 침공하며 2차 대전의 막을 올렸다. 16일 뒤 소련도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계 주민과 벨라루스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해 폴란드는 분할 점령됐다. 당시 무차별 학살로 희생된 폴란드 민간인 희생자는 알려진 것만 20만명에 달한다.
폴란드는 나치와 소련의 분할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에 망명 정부를 설립했고, 폴란드 내에서도 나치에 대한 지하 저항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1945년 열린 얄타회담에서 미국·소련·영국은 독소불가침조약에서 소련 몫으로 규정됐던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하고, 그 대신 동독의 일부를 폴란드에 주기로 합의했다. 폴란드로서는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역린'을 푸틴이 제대로 건드린 셈이다. 영국 가디언은 "2020년 나치 독일 패망 75주년을 앞두고 역사 논쟁은 더 불붙을 전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