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드라마를 보면 열에 아홉은 기억상실증 환자입니다. 그거이 자본주의에선 굉장히 흔한 병이디요." "기래? 미제 콜라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북한 군사들이 천진한 얼굴로 나누는 대화에 웃음이 터진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한 장면. 최근 대중문화계의 주요한 소재로 북한이 떠오르고 있다. 북한 사람이 주인공인 드라마·영화가 잇따라 나오고, 북한말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다. 북한 특유의 문화를 보여주는 포스터나 벽화가 디자인 요소로도 떠올랐다. 관객 500만명을 돌파한 영화 '백두산'도 북한 무력부 소속 리준평(이병헌)이 주인공이다. 남한 특전사 대위인 조인창(하정우)이 허둥지둥하는 것과 달리 리준평은 매섭고 날렵하다. 일부에선 이를 '북뽕'(북한에 취했다는 뜻)이라고도 부른다.
◇안방극장까지 북뽕
지난 28일 오후 실시간 검색어에 '귀때기'란 단어가 올라왔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북한 아이들이 도청감실 소속 군인의 아들을 몰아세우며 "니(네)가 귀때기 아들이라며?"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나와서다. 귀때기는 '도청하는 사람'을 일컫는 북한 은어. '사랑의 불시착'이 방영되고 나면 실제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드라마 속 북한말을 정리한 글이 와글와글 올라온다. '김치움'(반찬 저장고) '손전화'(휴대전화) '살 까기'(다이어트) '후라이 까기'(거짓말) 등의 뜻을 정리하는 식이다. 주부 최해인(37)씨는 "드라마를 보고 친구들과 채팅방에서 북한말 흉내를 내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고 했다.
북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 게 처음은 아니다. 북한 여장교와 남한 왕자가 만난 '더킹 투하츠'(2012), 탈북 의사가 남한의 병원에서 일하는 '닥터 이방인'(2014)도 있었다. 과거엔 남북의 분단 상황을 극적 장치로 썼다면, 지금은 아예 다른 체제의 주인공이 부딪치는 상황을 일종의 화학작용처럼 녹인다. 북한 문화에 감응하는 모습도 그만큼 더 많이 비친다. '사랑의 불시착'에는 정전으로 기차가 멈추자 윤세리(손예진)와 리정혁(현빈)이 기차에서 내려 모닥불을 피우고 옥수수를 구워 먹는 장면이 나왔다. 탈북 소설가 이지명씨는 "전기가 부족한 북한에선 정전으로 기차가 멈추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겨울에 정전돼 기차가 열흘, 보름씩 멈춰 서 있기도 한다. 도둑질은 물론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기는 처참한 상황이다. 정답게 옥수수 구워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탈북자는 "주민들이 맥주를 마시며 생일 파티를 하는 모습 등이 동화처럼 해맑게 그려졌다. 실상은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에 눌린 모습인데 지나치게 미화·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영화 '백두산'에선 북한 측 요원이 한반도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반면, 미군은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져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포털사이트 관람객 영화 평점에는 '왜 미군이 악, 북한이 선인 건가?' '친북 반일 반미가 요즘 한국 영화의 트렌드인가?' 같은 반응도 올라왔다.
◇잘생기고 트렌디한 게 북한?
재작년 개봉한 영화 '공조'에선 현빈이 북한 형사를, '강철비'에선 정우성이 북한 정예요원을 연기했다. 2013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선 김수현이 북한 간첩을, 같은 해 개봉한 '용의자'에선 공유가 북한 정예요원을 연기했다. 드라마 평론가 공희정씨는 "흥행을 위한 것이겠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어디로 향하는지 볼 수 있다"고 했다. 디자인에서도 북한은 떠오르는 키워드다. 북한의 각종 미술품과 생활용품을 수집해온 영국의 니컬러스 보너가 '메이드 인 조선'이라는 책자를 펴냈고, 올해 초 관련 전시도 열렸다. 북한풍 라벨을 붙인 과자, 커피 등도 잇따라 나왔다. 촌스러운 것을 재조명하는 뉴트로 열풍과 맞물린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