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용 산업1부 차장

언제부터인가 정부가 발표하는 '10년 내 세계 ○위' '경제 효과 ○○○조원' 식의 로드맵은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제 개발 계획을 벤치마킹해 정부마다 '747' 등 버스 번호 같은 숫자 조합의 경제 목표치를 제시하지만, 결과는 허망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도 거창한 숫자를 붙여 구상을 쏟아내고 있지만, 감동도 비전도 현실감도 없다.

만약 현 정부 구상대로라면 우리나라는 10년 뒤엔 눈이 휘둥그레질 엄청난 경제가 되어있을 것이다. 미래 자율주행차, 수소·전기차, 5G(5세대 이동통신) 스마트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AI(인공지능) 반도체 같은 핵심 미래 산업에서 모두 세계 1위다.

가령 지난 17일 20부처가 함께 내놓은 인공지능(AI) 국가 전략에 따르면, 2030년 AI의 경제 효과는 최대 455조원으로 우리나라는 디지털 경쟁력 세계 3위, 삶의 질 세계 10위로 올라선다. 정부는 AI 반도체 경쟁력 확보를 위해 2029년까지 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한 해 1000억원꼴이다. 이 돈으로 AI 반도체 세계 1위를 하겠다는 것이다. 민간 반도체 회사는 한 해에만 수십조원씩 연구·개발에 쏟아붓는다.

1월에 발표한 수소 경제 활성화 구상은 더욱 황당하다. 수소차 누적 생산은 2022년엔 8만1000대, 2040년엔 무려 620만대로, 세계 1위가 된다. 그런데 불과 열 달 뒤인 지난 10월에 발표한 미래차 산업 발전 전략 로드맵에선 이 목표가 10년이 당겨져 2030년에 수소·전기차 보급 세계 1위가 된다. 대체 열 달 사이에 우리나라에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해 이런 기적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 로드맵도 과거 정부 때 만든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친환경 수소 경제 구현을 위한 마스터플랜에서는 2040년 수소차 보급이 전체 자동차의 절반이 넘는 1250만대였다. 2020년이면 수소차 195만대가 전국 도로를 달린다고 했다. 11월 말 현재 등록된 수소차는 5000대도 안 된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 수소 충전소 86곳(착공 포함)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25곳에 불과하고, 그나마 2곳은 수리 중이다. 꿈같은 숫자를 불러놓고,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부의 로드맵은 기업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포장하는 '사기성'도 있다. 정부는 지난 4월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에서 2030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세계 1위를 목표로 내세웠다. 전략은 금융·세제 지원,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대기업에 성과 보수를 준다는 게 고작이다. 대신 삼성전자가 연구·개발에 133조원을 투자한다. 기업 로드맵에 정부가 숟가락만 얹었다. 재계에선 "정부보다 삼성 로드맵에 더 믿음이 간다"고 말한다.

로드맵 발표 이후엔 아무도 관심이 없고, 챙기지도 않는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구상이고, 정권 바뀌면 캐비닛으로 들어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기업도 믿지 않는다. 신산업을 정부가 주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로드맵에서 특히 부족한 것은 진정성이다. 대못 규제, 중복 규제를 없애겠다고 하지만 정작 AI·바이오헬스·드론·핀테크와 같은 신산업의 원유인 데이터 3법은 폐기 위기다. '타다' 같은 새로운 서비스는 이해 갈등에 사업 추진이 불투명해졌다. 한 대기업 임원은 "차량 내비게이션, 스마트폰 지도가 넘치는데 요즘 누가 정부가 세워놓은 도로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아가느냐"고 했다. 이런 식의 로드맵은 더 이상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