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20여 분만에 진화했지만… 2명 사망·31명 부상
불보다 빠르게 번진 '연기'가 피해 키워… 복도식 구조 영향
비상계단 벽 곳곳에 검은 손자국·찢긴 천막… 급박했던 대피
방화 용의자, 횡설수설… 경찰, 정신감정 위해 '프로파일러' 투입

"불보다 연기가 더 무서웠당께. 공장에 큰 굴뚝 알지요, 거서 나온 것보다 더 시커멨지."

23일 오전 10시 광주 북구 두암동 모텔 화재 현장. 건물 곳곳에서는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탄내가 진동했다. 검게 그을린 건물 외벽과 불타 녹아버린 철제 방충망, 비상계단 벽에 묻은 여러 사람의 손자국이 전날 화마(火魔)의 강도를 짐작게 했다. 건물 옆 주차장 지붕 천막은 불에 탄 채 반쯤 뜯겨져 나갔다. 3층에서 시작된 불길을 피하기 위해 한 여성 투숙객이 4층에서 뛰어내렸고, 천막이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재 역할을 하면서 목숨을 살렸다. 휘어진 지붕 철제 뼈대와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창 조각들이 당시 급박했던 대피 상황을 보여줬다.

지난 22일 오전 방화로 의심되는 불이 나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광주 북구 두암동 모텔 내부 벽면에 누군가 벽을 짚은 흔적이 남겨져 있다.

◇"불보다 시커먼 연기가 더 무서워.. 탈출한 사람도 쓰러져"
불길은 지난 22일 오전 5시 46분 모텔 3층 308호에서 시작됐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전 12시 11분쯤 3일간 투숙하겠다고 들어온 30대 김모(39)씨는 방에 들어온 지 약 5시간 뒤 라이터를 이용해 자신의 방 베개에 불을 붙였다. 불이 잘 붙지 않자, 곽 휴지를 함께 태웠고, 그 위에 불이 잘 붙는 솜이불을 덮었다. 불길은 빠르게 확산했고 이불과 커튼, 목재로 된 침대 등을 태우면서 방안은 금방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땡땡땡" 화재경보기도 울렸지만, 투숙객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일요일 새벽 시간대여서, 투숙객 다수가 119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화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들은 깨운 건 소방관들이었다. 화재 진압과 구조에 나선 소방관들은 벽이나 문 등을 두드려 소음을 냈고, 이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투숙객들이 연기가 가득 찬 건물을 스스로 빠져나오거나 소방관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23일 오전 8시 전날 방화가 발생한 광주 북구 두암동 모텔 308호의 외벽이 까맣게 그을려 있다.

화재 당시 모텔에는 32개 객실에 투숙객 49명과 주인·관계자 4명 등 53명의 투숙객이 머물러 있었다. 2~3층 투숙객 20명은 자력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불길은 이미 복도로 옮겨붙었고, 외벽을 타고 4층으로 향하는 상황. 복도 내부는 검은 연기가 들어차 투숙객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비상등에만 의존해 출구를 찾았다고 한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좁은 복도로 인해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피해가 컸다. 사망자 2명도 각각 3층과 5층에서 나왔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모텔 투숙객 31명도 유독 가스 흡입 등으로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시민들은 "불보다 무서운게 연기"였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이흥주(63)씨는 "연기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얼굴이 온통 시커메서 깜짝 놀랐다"며 "겨우 뛰쳐나온 사람들도 연기를 마셔 피식피식 쓰러졌다"고 했다.

인근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김지은(35)씨는 "모텔이 오래 전에 지어져 침구와 자재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 유독가스가 발생하는 나일론 소재였다"며 "불보다 검은 연기가 3층 복도를 가득 채웠고, 위층에 머물던 투숙객들이 연기를 많이 마셨고, 줄줄이 들 것에 실려 나왔다"고 했다.

또 다른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점주는 "모텔 건물 구조 때문에 연기가 순식간에 퍼진 것도 있다"고 말했다. 점주는 "모텔이 계단이 가운데 있고 양 측으로 객실이 늘어서 있는 복도형 아파트 구조"라며 "308호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 연기가 3층 전체로 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22일 오전 광주 북구 두암동의 한 모텔에서 방화로 의심되는 불이나 수십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불이 최초로 발생한 모텔 308호 내부 모습.

◇ 소방당국, 화재 컸던 이유… 구조·방화문 "불보다 연기가 문제… 방화문 열려있어 피해 커져"

소방당국은 전날 화재와 관련해 불보다는 연기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질식사로 인한 피해가 컸다고 분석했다. 실제 불은 발화 20여분 만인 오전 6시 7분쯤 진화됐지만, 모텔 3층에서 5층까지는 연기로 가득 찼다.

소방당국은 연기가 빠르게 확산한 배경에 대해 모텔의 ‘구조’를 지적했다. 모텔처럼 밀폐된 구조에서 여러 객실이 있는 공간은 화재가 발생할 경우 불보다 연기가 먼저 복도로 새어 나온다. 이후 연기 냄새를 맡은 투숙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객실 문을 열게 되면서, 다량의 산소가 유입되면서 침구나 가연소재가 더 빨리 탈 수 있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여기에 복도에 바람길이 만들어지면서 연기가 더 빠르게 위층으로 퍼지는 구조라는 것이다.

22일 오전 광주 북구 두암동의 한 모텔에서 불이 나 수십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은 불에 타버린 모텔 복도의 모습

광주 북부소방서 관계자는 "화재가 발생한 308호 객실이 건물 비상계단의 바로 옆이었던 점에서 연기가 비상계단을 타고 건물 전체로 더 빨리 퍼졌다"면서 "부상자 대부분이 유독가스 흡입 등으로 인한 질식 증세를 보였다"고 했다.

또 현장에서 확인한 모텔에는 연기를 막는 방연벽이 따로 없었다. 화재 당시 불길을 막아줄 방화문도 열려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방대원은 "화재 진압으로 건물에 들어갔을 당시 평소에는 닫혀있어야 할 방화문이 열려있었다"며 "방화문만 닫혀 있거나, 스프링클러만 있었어도 인명피해가 줄었을텐데 안타깝다"고 했다.

해당 건물은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아도 됐었던 1996년 준공됐다. 숙박시설의 경우 6층 이상, 1000㎡(약 303평) 이상의 규모가 의무설치 대상이지만, 5층이라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경찰은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혐의로 긴급체포한 김씨를 상대로 범행 동기 등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협한다" "저 여자 좀 눈 앞에서 치워달라" 등의 횡설수설하는 진술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날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전문의에게 김씨 정신감정을 의뢰하는 한편,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도 조사에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소방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이날 오후 3시부터는 2차 현장감식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