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선 협회의 1954년 한국 경제 보고서(왼쪽)는 최근 ‘한국 경제의 재건을 위한 진단과 처방’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간됐다.

"우리는 한국인의 용기, 의지력, 결심에 특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재건 사업은 거대하고 힘들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망 없는 일은 아닙니다. 적절한 원조가 있고 분별 있게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만 한다면, 한국은 경제적 자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6·25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2월.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의뢰로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현지 조사를 마친 미국 경제 전문가 로버트 네이선(1908~2001)은 최종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근면·성실성을 잃지 않았던 한국인들에게서 경제 재건의 희망을 엿본 것이다. '한국 최초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불리는 1954년 '네이선 보고서'가 최근 번역 출간됐다. 조영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류상윤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홍제환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네이선 보고서'를 번역하고 해제를 붙여 '한국 경제의 재건을 위한 진단과 처방'(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을 펴냈다. 1950년대 당시 산업은행·민의원 등에서 이 보고서를 번역해 철필(鐵筆)로 등사하기도 했지만 희귀 자료로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웠다.

1945~1954년은 분단과 전쟁으로 남아 있는 경제 자료부터 드물다. 이 때문에 경제사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통계의 공백기'로 부른다. 하지만 네이선이 창립한 미국 민간 경제 연구소인 '네이선 협회'는 현지 조사를 통해 1952년 예비 보고서를 제출한 뒤 1954년 최종 보고서를 발간했다. 당시 생활수준과 산업 현황, 인플레이션 등에 대한 생생한 자료와 통계가 담겼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전시(戰時)생산위원회 계획위원장으로 근무한 로버트 네이선(오른쪽)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쟁 직전인 1949~1950년 한국의 1인당 GNP는 87.02달러였다. 전쟁 당시인 1952~1953년과 종전 이후인 1953~1954년에는 각각 64.12달러와 78.17달러로 떨어졌다는 추계치도 이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번역자들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직후의 한국 경제를 이처럼 체계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는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의 참화에도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네이선 보고서는 '한국인의 능력과 국민성'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최근 수년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곤경 속에서 보여준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은 모든 외국인 관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신변의 정리와 정결을 유지하는 국민성은 주목할 만하다. 모든 이러한 특성은 장래 경제 번영의 추진력이 될 것이다."

네이선 보고서는 1954~1959년의 5년간 19억3000만달러의 투자를 통해서 1인당 GNP를 103.26달러까지 끌어올린다는 야심 찬 계획을 제시했다. 농업과 광산업을 통한 경제 발전에 관심을 쏟았고, 수력 중심의 전력 생산을 추구해야 한다는 제언을 내놓은 것도 특징이다.

이 보고서는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 공식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60년대에도 네이선은 한국 경제 관련 자문을 맡으며 인연을 이어갔다. 1965년 상공부의 수출진흥종합시책 평가, 1965~1967년 3개년 수출계획 평가,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조세 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이자 현장 관찰자가 된 것이다. 조영준 교수는 "이 보고서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선진국의 정책이나 조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