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송년회는 야만적이었다. 1차 맛집, 2차 술집, 3차 노래방…. 그 공식은 깨졌다. 지금 그랬다가는 꼰대 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2019년 송년회 트렌드 중 대세는 '공유 공간'이다. 일정 시간 사용료를 지불하고 빌린 공간에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요리를 만들어 먹거나 영화와 음악을 감상한다. 소공연장을 대여해 작은 음악회나 발표회로 연말 모임을 대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끼리' '방해받지 않고 프라이빗하게' '취향을 공유하는' 식이다. 인기 있는 공유 공간을 찾아 연말 모임 풍경을 내시경처럼 들여다보기로 했다.
달라진 연말 모임 트렌드
서울 용문동 공유 공간 '도시산장'에 도착한 노성훈(33)·박기준(32)씨는 장 봐온 재료들을 능숙하게 정리하며 요리를 준비했다. 금융권에서 일한다는 두 남자는 이날 모임을 "회사 동기 15명이 함께하는 연말 파티"라고 귀띔했다. 선발대 역할을 맡은 이들은 '당직 셰프'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시작했다.
노씨는 주방 한쪽에 있던 핸드 브루잉 커피 메이커에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카메라에 파티 준비 영상을 담기도 했다. 요리가 완성되는 동안 동료가 하나 둘 도착했다. 긴 테이블에 마주 앉은 일행은 두 남자가 준비한 스테이크와 술을 나눠 마시며 '그들만의 파티'를 즐겼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장소를 예약한 노씨는 "모임 구성원 중 기혼자가 여럿 있다 보니 숙소를 잡기는 부담스러웠다. 여행 기분을 내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도심의 공유 공간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일행은 이 파티 공간에 대해 "신의 한 수였다"며 극찬했다.
소속 팀의 연말 파티 장소 섭외를 몇 년간 도맡아온 광고회사 차장 이남희(40)씨는 "올해는 대형 스크린과 바(bar)가 있는 펍(pub) 같은 공간을 물색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 1년간 사내 행사 때마다 틈틈이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함께 보고 여유롭게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한 편 볼 계획"이라고 했다. 주부 한지혜(36)씨도 산후조리원 동기들과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 장소로 일산 자택 근처 공유 공간을 택했다. "어린아이들이 있어 그동안 키즈 카페, 취사 가능한 레지던스 호텔 등에서만 모였는데 최근엔 집 같은 공유 공간을 찾아내 애용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 공유 공간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12월 들어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미디어에는 공유 공간 모임 사진과 후기가 속속 올라오고 있다. 공유 공간 플랫폼인 '스페이스클라우드' 송수민(31) 서비스팀장은 "스페이스클라우드 서비스 기준으로 공유 공간 이용률은 2018년에 급증했고 올해는 더 폭발적으로 늘었다"며 "공간 공유 업체와 이용자를 포함한 서비스 누적 이용자는 총 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올해 17만 명쯤 증가했다"고 했다. 이용 건수 역시 12월이 으뜸이다. 비수기 대비 3~4배 수준. 단체 모임이 가능한 공유 공간 중 교통 좋고 가성비도 괜찮은 곳은 12월 초에 이미 예약이 마감됐다. 하지만 아쉬워 마시라. 연말에 가까울수록 선택의 폭이 줄어들 뿐, 대여 가능한 공간이 아직 남아 있다.
주방을 갖춘 단독 공간이 인기
연말에 예약률이 높은 공간은 '주방을 갖춘 단독 공간'이다. 대부분 요리는 물론 배달 음식·케이터링 서비스가 가능해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특히 10인 이상 단체를 수용하는 도심의 단독 공간은 이 시기에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서울 북촌·서촌 일대엔 현대식 한옥을 통째로 빌릴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삼청동길 골목 안쪽 팔판동에 있는 여가생활은 소규모 모임부터 최대 16인까지 수용 가능하다. 규모를 고려할 때 적정 수준은 10명 안팎. 'ㄷ' 자 형태의 한옥에 아담한 마당,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주방, 10인용 테이블이 있는 거실, 욕실 등을 갖췄다. 주인 전상진(37)씨가 직접 지은 한옥은 공간 이름처럼 여가 생활을 하기에 최적화돼 있다. 10인 한식·양식 도자기 그릇 세트, 각종 조리 도구, 요리를 위한 주방 가전을 비롯해 빔프로젝터와 TV, 스피커, 노트북 등이 있어 요리를 맛보며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지난 14일 이곳에서 기업 연수원 동기 모임을 연 직장인 김인직(32)씨는 "오랜만에 만나는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 이곳을 택했다"며 "단독 공간이다 보니 대화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김씨를 포함해 모임 참가자 8명은 각자 조각 케이크, 비스킷, 맥주 등을 사 들고 와 펼쳐놓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엔 배달 음식으로 파티 상을 뚝딱 차렸다. 한옥 특성상 금연 공간으로 운영하며 바비큐 등 과한 요리는 삼가고 있다. 주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갤러리 등 즐길 거리가 많아 삼청동 나들이 겸 모임 코스로 추천한다. 10인 이하 최소 3시간 이상 대여 가능하며 대여료는 1시간 3만5000원. 인근 필운동 소소하우스는 6~8인 모임에 알맞다. 테이블이 놓인 아늑한 대청마루에서 마당을 바라보며 겨울 한옥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2시간 단위로 예약 가능해 이용료에 대한 부담이 적은 편. 다만 18일 현재 주말 예약은 마감됐다. 평일 일부 시간대만 예약이 가능하다. 8인 이하 최소 2시간 이상 대여할 수 있으며 대여료는 1시간 3만5000원.
서울 용문동 도시산장은 60년 된 목조 와즙(기와로 지붕을 이은) 주택을 현대식으로 고친 소규모 복합 문화 공간을 지향한다. 용문전통시장 부근 주택가 골목 안쪽에 있어 꼭 어린 시절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창가의 구상나무 크리스마스트리가 연말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커다란 창문 안 16인용 테이블에 마주 앉아 여럿이 파티를 즐기는 풍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무인 공간으로 운영한다. 낡은 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갈 때부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바깥 화장실을 제외하고 'ㄱ' 자 형태인 단층집 안에서 무게중심은 단연 오픈 주방. 요리에 필요한 시설이 잘 구비돼 있어 그동안 셰프들의 팝업레스토랑이나 쿠킹클래스·요리 촬영 공간으로 애용됐다. 커피를 내릴 수 있는 도구도 다양하다. 이 공간 이용객들에겐 당일 갈아놓은 원두를 무료로 제공한다. 대여 가능 시간은 '브런치 타임'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디너 타임'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다. 하루 최대 2팀, 한 팀당 6시간 대여 가능하다. 대여료는 1시간 3만6000원부터.
서울 사간동 루프탑 탁트인은 삼청동 초입, 6층 빌딩 루프톱에서 바비큐 파티(가스 그릴 대여료 3만원 별도)를 즐길 수 있다. 서향으로 난 테라스 너머 경복궁과 청와대가 한눈에 보인다. 인왕산 방향 일몰 감상은 덤. 대형 와인냉장고, 와인잔 등을 비롯한 주류 관련 물품을 넉넉하게 갖춘 바가 있다. 이용객이 준비해온 주류 외에 생맥주 등도 후불로 이용 가능하다. 바비큐 재료 준비가 번거롭다면 바비큐 패키지(1인 기준 돼지고기 3만원, 횡성한우 8만원)를 예약하면 된다. 대여 시간은 주간(오전 11시~오후 5시)과 야간(오후 7시~다음 날 오전 9시)으로 나뉜다. 10인 기준 대여료는 날짜와 주·야간에 따라 25만원부터.
요리사가 해준 음식을 먹고 공간 전체를 빌린 듯 파티 기분을 낼 수 있는 곳도 있다. 서울 구기동 쿠킹스튜디오 이여로는 최소 6인 이상 최대 12명이 식사할 경우 쿠킹스튜디오를 최대 4시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일반 식당의 단체석과 다른 점은 쿠킹스튜디오로 꾸민 집 전체를 한 팀에만 내어준다는 사실. 여유롭게 식사하며 모임에 집중할 수 있다. 텃밭을 겸한 아담한 마당과 테라스 등은 주부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다. 쿠킹스튜디오를 손수 가꾼 주인 겸 요리블로거 '미소로' 박진숙(55)씨는 "오픈 후 1년 동안 요리 동호인들이 알음알음 이용해오다 최근 광고 촬영 등을 하면서 공간 대여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촬영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 대여료는 1시간 기준 10만원. 일반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사 메뉴는 예약 손님의 취향과 재료 수급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주인장 맘대로' 정한다. 와인 반입 가능하다.
서울 근교, 공간·날짜 선택 폭넓어져
서울 도심을 살짝 벗어나면 한층 여유로운 공간이 기다린다. 경기도 일산 마두동 덴마크주택은 주택가에 있지만 통유리창 너머로 '설촌공원'이 보여 탁 트인 개방감을 자랑한다. 인원이 많은 단체 모임이어도 실내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브라이덜 샤워(결혼 전 신부가 주관하는 파티)나 소규모 돌잔치, 생일 파티, 회사의 워크숍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주인 김은호(37)·권은겸(36) 부부가 자택 1층을 쇼핑몰 매장으로 운영하다 직접 인테리어를 해 공유 공간으로 꾸몄다. 작은 방, 거실, 주방으로 이뤄진 공간은 자연 채광이 잘 돼 밝은 분위기다. 저녁 모임뿐 아니라 낮 모임 장소로도 많이 찾는다. 커다란 오픈 주방에는 요리를 위한 주방 도구들이 잘 갖춰져 있다. 낮에는 차(茶) 동호인 모임과 독서 모임, 포틀럭 파티를 겸한 브런치 모임도 많이 열린다. 안주인 권은겸씨는 "바닥에 보일러가 들어와 어르신이나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모임 장소로도 애용된다"고 했다. 협력 업체를 통해 케이터링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최소 5시간 기준, 1시간에 평일 2만5000원·주말 4만원. 시간 추가 시 1시간당 2만원.
일부 비품은 추가 요금… 뒷정리 안하면 청소비도
공유 공간 활용 팁
공유 공간은 크게 두 부류다. 기획 단계부터 공유를 목적으로 꾸민 공간이 하나, 공방·카페·식당·공연장·세미나실 등을 사용하지 않는 시간대에 필요한 이들에게 대여하는 공간이 다른 하나다. 공간 공유 플랫폼 ‘스페이스클라우드’에 공유 공간으로 등록한 업체는 12월 18일 현재 1만여 개. 미등록 공간까지 합하면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렵다. 공유 공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데 필요한 팁을 정리했다.
인터넷에 올려진 사진과 실제 공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전 답사가 필요할 경우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답사 후 예약한다. 답사할 때 교통편, 주변 환경, 주차 가능 공간 등도 세심하게 살펴본다. 대여료는 사용 시간 동안 공간을 이용할 기준 인원에 해당하는 요금이다. 인원과 시간이 초과될 경우 추가 요금이 발생할 수 있다. 이용 시간은 도착 후 뒷정리를 끝내는 시간까지 포함한다. 대여료가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용 날짜와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일부 공간은 여기에 청소비까지 붙는다. 보증금을 받고 뒷정리 확인 후 반환해주는 곳도 있으니 방문 전에 체크할 것. 공유 주방을 이용할 계획이라면 요리에 따른 주방 도구가 갖춰져 있는지, 식기가 넉넉한지 등을 살피고 부족한 것은 준비해 가야 한다. 무료 제공 물품과 추가 요금이 붙는 비품 등도 미리 확인하자. 한옥을 제외한 도시의 공유 공간들은 도시민박법 상 내국인 숙박이 금지돼 있다. 아무리 집처럼 편해도 밤새우는 건 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