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가 보름여간 이어진 반(反) 정부 시위에 책임을 지고 29일(현지 시각)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리리 총리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의 목소리를 최대한 들으려 했지만 나는 막다른 길에 갇혔다. 이번 위기를 타개하려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하리리 총리는 "사임은 시위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자, 국가를 위한 헌신"이라고 덧붙였다.
레바논 통신·미디어 재벌 출신인 하리리 총리는 1990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고(故) 라픽 하리리 전(前) 총리의 아들이다. 라픽 전 총리는 2005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대규모 차량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
아들 하리리 총리는 2016년 12월 정치 명문가 간판과 재력을 동시에 등에 업고 비교적 쉽게 총리직에 올랐지만, 3년도 채 안돼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면서 하리리 가문은 부자(父子)가 정계에 발을 들여 불운을 자초한 사례로 남게 됐다.
하리리 총리를 끌어내린 레바논 시위는 ‘소규모 과세’가 도화선이 됐다. 정부가 레바논 국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앱) ‘왓츠앱(WhatsApp)’ 이용자에게 "20센트(약 230원)를 이용료 명목으로 과세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만성적인 민생고와 실업난에 고통받던 레바논 국민들에게 ‘카톡 세금’에 비할 법한 ‘왓츠앱 세금’은 누적된 분노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됐다. 결국 17일부터 시작한 반정부 시위는 불과 3일도 지나지 않아 레바논 전체 인구 4분의 1이 참여하는 대형 시위로 커졌다.
하리리 총리는 시위가 손쓸 수 없이 확산되자 부랴부랴 21일 공무원 봉급 삭감안과 시중 은행에 대한 자금 지원안 같은 개혁 조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한번 터진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퇴진으로 이어졌다.
레바논의 국가 부채는 860억 달러(약 103조원)로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50%나 된다. 35세 미만 청년층의 실업률은 약 37%나 될 정도로 심각하다.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이 유입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이 와중에 하리리 총리를 위시한 주요 정치인들과 상위 0.1% 부자들은 국민 소득의 10%를 차지하는 등 양극화가 극심해져 국민들의 박탈감을 키웠다.
라미 쿠리 베이루트 아메리칸대학 교수는 중동 유력매체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하리리 총리 사퇴는 반정부 시위가 거둔 큰 승리이자 결정적 전환점"이라면서도 "반정부 시위대의 바람처럼 정파에 휩쓸리지 않은 전문 관료로 구성된 정부가 앞으로 구성될 것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