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찬 실리콘밸리 특파원

"입주 자격이 안 되시는군요."

지난달 초 실리콘밸리 중심가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의 한 아파트. 거실에 화장실 하나 딸린 17평(56㎡)짜리 스튜디오(studio)에 입주 신청을 했더니 담당 직원이 한 말이다. 신청서에 쓴 연봉(年俸)이 문제였다. 기존 급여에 특파원 체재비까지 모두 합쳐 한국 기준으로 남 못지않은 액수를 적었다. 나름 어깨 좀 폈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 달에 얼마 받으시죠? 월 렌트비의 세 배를 벌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회사가 모든 체재비를 부담한다는 서류를 보여주고 나서야 입주 허가가 떨어졌지만 왠지 사는 게 순탄할 것 같지 않아 계약을 포기했다. 이 아파트 월세는 2630달러(약 320만원). 가장 작은 방 한 칸도 연봉이 최소 9만5000달러(약 1억1500만원)는 돼야 입주 자격이 된다. 살인적인 집값과 높은 문턱이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미국 대표 온라인 벼룩시장인 크레이그스리스트(craigslist)를 뒤지기 시작했다. 가뭄에 콩 나듯 월 2000달러 초반에 침대·소파·책상 같은 가구까지 갖춰진 매물이 보였다. 이메일을 보낼 때마다 '집은 당장 보여주기 어렵다. 보고 싶으면 우선 보증금에 한 달치 월세를 먼저 보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둘도 아니고 네 명이나 그랬다. 처음엔 의심하다 나중엔 '이게 실리콘밸리 스타일인가' 했다. 한 한인 변호사에게 물으니 "그런 계약은 처음 들어본다. 볼 것도 없이 사기"라고 했다. 세상 물정 어두운 외국인이나 사회 초년병을 노린 '미끼 매물'이었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덜컥 돈부터 부쳤으면 수백만원을 날렸을 것이다. 지난해 실리콘밸리 주택 매매가 중간값(모든 가격을 늘어놨을 때 중간에 위치한 가격)은 118만달러(약 14억3000만원)였다. 아파트 월세 중간값은 2911달러(약 352만원). 대학 갓 졸업한 신입 엔지니어 초봉이 1억 중반부터 시작하는 구글·애플·페이스북 직원 정도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집 구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점차 늘고 있다. 지난 7일 구글 본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 인근의 랜딩스(Landings) 드라이브. 앞유리에는 뽀얀 먼지가, 차량 지붕엔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인 대형 캠핑카 10여 대가 나란히 주차돼 있었다〈사진〉. 모든 창문은 이불, 은박 돗자리 혹은 하얀색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다. 차 뒤에는 이동용 자전거와 가스통이 매달려 있고, 간이 발전기를 밖에 내놓고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높은 주택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캠핑카족(族)'을 자처한 이들이다. 여기서 차로 10분쯤 떨어진 렝스토프공원 인근에도 캠핑카 50여 대가 빽빽하게 주차돼 있었다. 주 당국은 실리콘밸리에 이 같은 캠핑카족 수천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본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스탠퍼드대 직원, 경찰관처럼 버젓한 직업을 가진 이들도 차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가상의 인터넷 공간을 지배하는 세계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삶의 터전에선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