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ㅣ비(BEA)

분홍색 벽지의 방에는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원피스와 어린아이들이나 갖고 놀 법한 인형이 즐비하다. 이 화려한 방의 주인 '비'는 8년간 원인 모를 체력 저하증을 앓는 20대 여성. 새로운 간병인 '레이'와 만나 깔깔대는 장면으로 유쾌하게 시작되는 연극 '비(BEA)'(연출 김광보)는 비가 레이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면서 돌변한다. "내가 하는 말을 편지에 받아 적어줘. '엄마, 난 정말 죽고 싶어요….'"

병마에도 활기가 넘치는 비와, 냉철한 변호사지만 아픈 딸만은 끔찍하게 위하는 엄마 캐더린은 언뜻 보기엔 평화롭다. 그러나 한 꺼풀 들추면, 모녀의 시계는 비가 아프기 전인 8년 전에 멈춰 있다. 캐더린이 성인이 된 딸을 '붕붕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비의 방이 어린 소녀에게나 어울릴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것도 그 때문.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인 비는 육체적 쾌락에 끌리고, 동시에 아픈 자신을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괴롭다. 특별한 공감 능력을 가진 레이를 첫눈에 알아본 비는 숨겨온 속내를 털어놓는다. 레이와 비의 교감은 딸의 소망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던 캐더린의 마음에도 서서히 변화를 일으킨다.

'안락사'라는 주제를 사람과 사람 사이 공감의 문제로 풀어낸 방식이 신선하다. 영국 극작가 믹 고든의 작품을 연출가 김광보가 국내 무대에 이질감 없이 옮겼다. 배우 세 명만 나오는 연극이지만, 비 역의 백은혜를 비롯해 배우들의 내공 있는 연기가 늘어짐 없이 극을 이끈다. 뒤로 갈수록 흡인력이 세지나, 감정 과잉인 몇몇 장면이 몰입을 깨트리는 것은 아쉽다. 10월 3일까지, 서울 대학로 콘텐츠그라운드.

재즈ㅣ전송이 트리오 & 홍선미 퀸텟

유럽 재즈계를 매혹한 두 한국 여성 뮤지션을 만난다. 깨끗한 음색과 기악 형식 보컬로 창의적 무대를 선사하는 보컬리스트 전송이와, 도전적이면서도 교묘한 연주의 드러머 홍선미. 뉴욕에서 주로 활동했던 ‘괴물 보컬리스트’ 전송이는 최근 스위스 바젤로 주 무대를 옮겼다. ‘정선 아리랑’을 여러가지 형식 재즈로 변주해온 만큼 이번에도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네덜란드 최고 권위 재즈 경연 대회 ‘더치 재즈 컴피티션’에서 우승을 차지한 홍선미는 자신의 퀸텟과 함께 국내 첫 공연을 펼친다. 다섯 멤버의 교감으로 태어나는 놀라운 즉흥 연주를 기대할 차례. 7일 오후 7시, 서울 마포 CJ아지트 광흥창.

전시ㅣ필리핀 미술, 그 다양성과 …

한세예스24문화재단 주최 ‘필리핀 미술, 그 다양성과 역동성’ 전시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오는 9일까지 열린다. 한국·필리핀 수교 70주년을 맞아 현대 미술 작가 11인의 회화·조각 등 30여점을 소개한다. 호안 프랭크 사바도(50)는 필리핀 전통 문양 및 지형을 문양화하고, 식민의 상처를 그려내는 잉글랜드 히달고(42)의 그림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 연작을 연상케 한다. 활달한 열대의 색채를 사용하는 한국계 키티 카부로(32)도 참여했다. 최은주 큐레이터는 “필리핀 현대미술은 우리보다 먼저 역동적으로 발전해왔다”고 했다. 7일 오후 2시 큐레이터 전시 투어가 진행된다. 무료.

클래식ㅣ서울시향 실내악 시리즈 IV

질끈 묶은 머리, 거칠게 자란 수염이 자유분방한 로커를 떠올리게 하는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53)가 소박한 실내악을 차린다. 7일 오후 5시 서울 세종체임버홀에서 열리는 ‘2019 서울시향 실내악 시리즈 IV’ 무대다. 열네 살에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데뷔한 그는 2014~201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였고, 지난해 7월엔 권위 있는 음반상인 황금 디아파종상을 받았으며, 올해는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로 활동 중이다. 제1바이올린 단원 주연경, 비올라 단원 안톤 강, 첼로 단원 김소연, 피아니스트 키벨리 되르켄과 함께 밝고 명랑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4번 등을 선보인다.

영화ㅣ바우하우스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는 건강한 도시락 같다. 먹기도 편하고 몸에도 좋다.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1차 세계대전이 사람들에게 남긴 정신적 상처와 혼돈을 추스를 건축과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실현하고 전파할 예술종합학교 바우하우스를 지었다. 꽃은 져도 열매는 남는다. 바우하우스는 폐교했지만 영향력은 이후에 더욱 커졌다. 범죄 조직이 판치는 빈민가인 콜롬비아의 메데인에 건축가들이 지하철역과 연결된 케이블카·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고, 체육관을 세우는 장면이 대표적. 범죄는 줄고 아이들은 뛰어논다. 꿈과 이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100년의 시간을 품은 필름. 아이들 교육을 위한 자료로도 썩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