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경 도쿄특파원

지난 17일 토요일 정오, 도쿄의 부촌 중 하나인 메구로구 지유가오카(自由が丘). 좁은 골목길은 주말을 맞아 사람들과 차량으로 빽빽했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멋진 지명에 걸맞은 상점과 맛집이 많이 들어선 덕분이다. 하지만 세련된 잡화점 사이 100m 남짓한 한 좁은 골목 풍경은 달랐다. 책가방을 등에 멘 초등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방학을 일주일 남짓 남겨둔 학생들이 향한 곳은 도쿄에서 유명한 한 입시 학원이다. 여름방학 특강을 들으러 온 것이다. 학원 건물 1층 외벽엔 지난해 합격 실적이 빼곡히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사진〉 와세다(早稻田) 209명, 게이오(慶應) 보통부 107명, 가이세이(開成) 273명…. 한국 여느 학원가와 마찬가지다. 이들이 자랑하는 실적은 명문 '대학교'가 아닌 명문 '중학교' 합격이다.

일본은 늘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둘러싼 열기를 신기해한다. 수능 날 경찰의 도움으로 지각을 면한 수험생의 이야기, 추위에 떨며 기도하는 교문 앞 학부모의 모습 등이 주요 방송사의 짧은 뉴스로 나온다. "고3 때 몇 시간 자고 공부했느냐"는 한국인을 향한 단골 질문이다.

반대로 한국인 눈에 신기한 건 도쿄 학부모들의 '사립(私立) 중학교 입시 열기'다. 사립중은 별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들어갈 수 있는 사학재단 중학교를 뜻한다. 대부분 같은 재단 고등학교까지 있어 중·고를 쭉 다닌다. 도쿄대생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가이세이중·고, 한국에도 유명한 와세다·게이오대 재단이 운영하는 중·고 등이 대표적이다. 명문으로 소문난 곳일수록 입학은 당연히 어려워 '난칸(難關·난관)' 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 언론들은 사립중 입시 붐이 도쿄·오사카·고베 등 대도시권에서 5년 전부터 되살아났다고 진단한다. 최근 몇 년 경기가 좋아진 점, 2020년대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대학 입시 제도 개혁이 예고된 점 등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같은 재단 중·고에서 6년간 꾸준히 입시를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도쿄도 조사 결과 지난해 중학생 30만명 중 약 7만4500명이 이 같은 사립중에 다녔다. 올해 신주쿠구 한 공립초 교장을 끝으로 은퇴한 한 교사는 "4학년이 되면 중학교 수험을 위해 학원에 가는 학생이 급격히 늘어난다"며 "6학년 중엔 입학시험(2월) 직전 독감을 핑계로 학교를 쉬면서 수험 공부를 하는 경우도 꽤 된다"고 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초등학교 4~6학년 3년간 평균 사교육비는 300만엔(약 3400만원), 한 달 8만3000엔 정도다. 학비는 더하다. 도쿄도 사립중 1학년 평균 학비는 95만9770엔(약 1100만원)으로 웬만한 한국 대학 학비보다 비싸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도 나올 수밖에 없다.

중학교 입시 경쟁의 배경으로 일본 특유의 조용하지만 공고한 '서열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비싸도 일단 명문 사립중에 입학하면 같은 재단 명문 사립고로 쉽게 진학할 수 있다. 명문 사립고는 압도적인 명문대 합격자 수를 자랑한다.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이 있는 경우 대학 진학은 더욱 수월하다. 와세다·게이오대 부속중 합격은 사실상 와세다·게이오대 입학을 보장한다. 일본 대기업 공채 시장에선 '학벌 필터'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교 간판이 여전히 중요한 스펙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연봉 차도 뺄 수 없다. 취업률 99% 사회에 존재하는 속사정이다. 자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는 부모의 불안한 마음엔 한국과 일본이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