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시오 마크리(오른쪽)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11일(현지 시각) 부에노스아이레스 당사에서 부통령 러닝메이트인 미겔 앙헬 피체토 상원 의원과 함께 연설하고 있다.

10월 예정된 아르헨티나 대선의 전초전 격인 예비선거에서 현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좌파연합 '모두의전선' 후보에게 큰 격차로 뒤진 것으로 집계됐다. 4년 전 좌파 포퓰리즘인 '페론주의(Peronismo)' 정당의 경제 실정에 우파(右派)인 마크리 대통령을 택한 아르헨티나가 다시 페론주의로 회귀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마약에 한번 중독된 뒤로는 좀체 그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11일(현지 시각) 치러진 대선 예비선거 개표 작업을 80% 이상 집계한 결과, 페론당 후보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47%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마크리 현 대통령은 33%에 그쳤다. 예비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집권당과 페론당 후보가 2%포인트 안팎의 박빙 승부를 펼칠 것으로 예상됐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격차다.

아르헨티나 대선은 크게 3단계로 진행된다. 이날 실시된 예비선거는 득표율 1.5% 미만 군소 후보를 걸러내는 절차다. 이후 10월 27일 본선을 치르는데, 여기서 45% 넘는 후보가 없으면 결선투표를 다시 치른다. 그런데 투표율이 76%에 달한 이날 예비선거에서 페론당의 페르난데스가 이미 47%가 넘는 득표율을 확보해 본선에서 바로 대통령 당선을 확정 지을 가능성이 커졌다. 마크리 대통령은 선거 후 기자회견에서 "안 좋은 선거였다"는 반응을 보였고, 페론당 페르난데스는 "저들 우파 정권이 부수어 놓은 것을 우리가 바로잡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史)는 페론당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가 이뤄진 1983년 이후 10명의 대통령 중 7명이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당 소속이었다. 페론주의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로 1947년 정의당을 만든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 전 대통령과 뮤지컬 '에비타'로 유명한 그의 아내 에바 페론으로부터 시작됐다. 친(親)노동정책과 저소득층 복지정책, 외세 불개입 등을 주 내용으로 하며 현대 좌파 포퓰리즘의 원조로도 평가받는 정치적 이념이다. 외국 자본을 추방하고 철도·전화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 빈곤층 중심의 분배 우선 정책을 폈다. 에바 페론은 특히 복지 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며 성녀(聖女)처럼 비쳤으나, 실제로는 사치가 극에 달했고 횡령한 거액의 돈을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로 옮겨놓은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빈민층은 에바를 성녀처럼 여기며 향수를 느끼고 있다.

11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대선 예비선거에서 1위를 기록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왼쪽에서 둘째) 좌파연합 ‘모두의전선’ 후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두 팔을 들어올리며 화답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후보는 예비선거에서 경쟁자인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을 10%포인트 넘는 격차로 앞섰다. 대선 본선은 10월 27일 치러진다.

1983년 이후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비(非)페론당 후보가 당선된 경우는 마크리 현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3명뿐이다. 그나마 중도 성향의 급진시민연합(UCR) 소속으로 당선됐던 라울 알폰신 대통령(1983~1989년 재임)과 페르난도 데라 루아 대통령(1999~2001년 재임)은 두 사람 모두 경제 실정에 대한 책임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마크리 현 대통령은 "포퓰리즘에서 나라를 해방시키겠다"는 슬로건으로 4년 전 당선됐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 위기가 발목을 잡고 있다. 5월 기준으로 지난 1년간 물가상승률은 57%에 달했고, 환율이 급등해 아르헨티나 화폐 가치는 3년 5개월 만에 4분의 1 토막 났다. 이 때문에 과거 포퓰리즘 정부에 대한 향수가 다시 강해지고 있다.

결국 마크리 대통령도 페론 향수에 굴복했다. 아예 자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페론당 상원 원내대표인 미겔 앙헬 피체토 의원을 지명한 것이다. 하지만 페론주의자들의 마음을 그에게 돌리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다시 '페론의 나라'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페론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온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마크리에게 정권을 내준 전임 대통령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 공무원 증원, 연금 확대와 같은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외신들은 페론당이 집권하면 크리스티나가 실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암허스트피허폰트증권의 남미 채권 책임자 시보안 모든은 블룸버그에 "불안한 외국인 투자자들로 아르헨티나의 화폐와 국채 가치가 급락할 것"이라며 "페론당의 후보가 너무 급진적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