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해외도피사범 1200명…송환자는 70명뿐
인터폴·범죄인인도조약 있지만 현실은 제한적
"정한근처럼 중요한 인물 아니면 쫓기 힘들어"
"사법공조는 결국 외교문제…준 만큼 받는 것"

#1996년 12월 전직 양궁선수 주모(44)씨는 내연녀 유모(51)씨의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주씨와 유씨는 이후 위조여권을 만들어 일본과 중국을 전전했다. 그러다 2015년 11월 주상하이 총영사관을 제 발로 찾아가 불법 체류자라며 자진해서 추방당했다.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막상 주씨와 유씨는 해외도피사범으로 분류 돼 공소시효가 정지된 상태였다. 법원에서 주씨는 징역 22년, 유씨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98년 5월 충북 제천에서 낙농업을 하던 래퍼 마이크로닷(본명 신재호·26)의 부모는 빚 갚을 여력이 안 되자 농장을 정리하고 뉴질랜드로 야반도주했다. 피해액만 수십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부부는 20년이란 세월 동안 세 차례나 이름을 바꾸며 자유롭게 살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지난해 뒤늦게 다시 논란이 되면서 마이크로닷 부모는 지난 4월 인천국제공항에서 체포됐다.

지난해 해외도피사범이 1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 대비 300명 가까이 급증했다. 반면 매년 해외도피사범 송환자 수는 100명이 채 안 된다. 도피사범을 잡아들일 우리 수사 인력 등 자원이 충분치 않은 데다 사법공조의 근본적인 한계가 원인으로 지적된다. 주로 해외에 근거지를 두고 범행을 저지르는 보이스피싱 사건이 늘어난 것도 도피사범 급증의 원인 중 하나다. 검찰 관계자는 "피의자가 이미 해외로 도망쳐 버리면 사실상 범죄자가 알아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란희

18일 법무부와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도피사범은 1200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5년 사이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해외도피사범은 2014년 600명대, 2015년 700명대 수준이다가 2016, 2017년 각각 946명, 939명을 기록했다. 반면 지난해 해외도피사범 송환자 수는 70명에 그쳤다. 오히려 2017년 74명보다 줄었다.

이처럼 해외도피사범 검거가 특별한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국에 국내 형사사법 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국 수사당국의 사법공조를 받아야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피의자를 긴급히 붙잡아 달라는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적색수배는 보통 협조 권고일 뿐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 등 일부 국가에서만 적색수배가 내려지면 의무적으로 피의자를 잡아두거나 추방하고 있다. 범죄인 검거 후 양국 간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른 인도 청구도 법무부, 외교부 등을 거쳐 이뤄지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하다. 당사자가 그 나라 법원에서 송환의 적법성을 다투겠다고 나서면 송환이 지연된다는 제약도 있다.

대검 관계자는 "실무에서는 우리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소재를 특정하지 않는 한 외국 수사기관이 알아서 찾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며 "최근 붙잡힌 정한근씨처럼 정말 중요한 인물이 아니면 잡으려고 발벗고 나서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고(故)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4남인 정씨는 지난달 18일(현지시각) 새벽 에콰도르를 출발해 미국 로스앤젤러스(LA)로 가려다 경유지인 파나마 공항에서 붙잡혔다. 정씨는 1998년 회삿돈 300억여원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잠적해 20여년 간 도피 생활을 했다. 또다른 대검 검사는 "사법공조라는 게 결국은 외교 문제"라며 "외교원칙 중 하나인 ‘상호주의’에 따라 우리쪽에서 저쪽 도피사범 10명 보내주면 저쪽에서도 10명 보내주는 식이다. 그만큼 우리도 외국의 도피사범을 많이 넘겨주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도피 21년 만에 중미 국가인 파나마에서 붙잡힌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아들 정한근 씨가 지난달 22일 오후 국적기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해 입국장을 나오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매년 꾸준히 늘어나는 보이스피싱 범죄가 해외도피사범 급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4400억원, 피해자는 4만8000여명으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각각 전년 대비 82.7%(2009억원), 57.6%(1만7824명) 늘어났다. 김경찬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외국 범죄 중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발생하고 대부분 보이스피싱 범죄"라며 "자취를 감추기 용이한 범죄라서 대검, 법무부, 외교부 거쳐서 사법공조를 요청하고 나면 이미 발빼고 사라진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출국금지 조치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 등 출입국 관리시스템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도피사범들이 모두 밀항을 하거나 여권을 위조해서 도망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의자로 입건됐는데도 출금조치가 되지 않아 나가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출금조치는 사안이 중하고 피의자가 도피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될 때만 제한적으로 내려진다"며 "입건됐다고 해서 모두 출금조치를 하면 고소만 당해도 출금이 되는데, 경우에 따라선 과도한 제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김경찬 연구위원은 "초국가적 범죄와 관련해서 지금의 형사사법공조는 긴밀하지 못하고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며 "범죄 유형에 따라 국가별로 공동논의를 하고 이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형사사법기관 뿐만 아니라 각국의 이민·출입국관리 담당기관의 공동대응 방안도 함께 논의가 돼야 한다"며 "이는 단기간에 공감대를 이루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