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었다. 소설가고, 이런저런 책을 냈다고 말한 뒤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방 창문에서는 옥수수밭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게 신선하다. 아침으로 사과 하나를 먹는데, 사과 껍질을 아침마다 옥수수밭에 쏟아버리는 식으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한다. 사과 껍질을 옥수수밭에 쏟아버리고 나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정말 그렇다. 나는 요즘 이렇게 살고 있다. 커튼을 걷으면 옥수수밭이 보인다. '바다 뷰'나 '시티 뷰'가 아닌 '옥수수 뷰'를 보며 살고 있다. 강원도에 있는 한 레지던스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레지던스에 가는데 그때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만난다. 일단 쓰레기 분리수거 방식이 다르고, 내가 사는 동네와 정서가 다르고, 무엇보다 만나는 사람들이 다르다. 여기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를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일은 옥수수 뷰만큼이나 신선하다. 또 새로운 책들도 만나게 된다. 알고 있었으나 읽지 못했던 책이나 세상에 존재하는지 몰랐으나 마음으로 돌진하는 책을.
이 책도 그렇게 만났다. 소설가 조경란이 쓴 '소설가의 사물'. 이 책은 토지문화관 도서관에 꽂혀 있었다. '역시나 소설가가 쓰는 산문은 참 좋군' 하며 빠져서 후다닥 읽었다. 가장 인상적인 글은 달걀에 대한 글이었다. 제목은 '달걀의 승리'. 소설 수업을 듣는 제자로부터 달걀을 선물 받는 게 이 글의 시작이다. 제자의 아버지가 마당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을 받고서 작가는 "이런 좋은 선물을 덥석 받아도 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소설인 '달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다. 야망 없이 살아가던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양계업을 시작하는데 망한다. 그 후 음식점을 차리는데 잘해 보려는 생각에서 손님들에게 무리수를 둔다. 음식만이 아니라 유흥거리도 같이 제공하려고 달걀 마술(?)을 부려보지만 손님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 아버지가 달걀 마술을 실패한 날에 대해 '소설가의 사물'의 작가는 이렇게 쓴다. "좁은 유리병에 달걀을 집어넣는 마술도 다 실패한 아버지가 마침내 어머니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어린 소년처럼' 우는 모습은 실제로 본 것 같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아버지의 빈 정수리를 어머니가 쓰다듬는 장면을 묘사한 이 부분은 또 얼마나 쓸쓸한지."
나는 이 책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토지문화관에서 3㎞쯤 떨어진 연세대 원주 캠퍼스로 갔다. 영문학자 여럿이 나누어 번역한 '현대 영미 단편선'에서 셔우드 앤더슨의 이 소설(김영미 번역)을 찾았다. 첫 문장은 이것이다. "내 확신컨대 우리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아, 하고 한숨이 나왔다. 이 소설은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인 아버지가 천성을 잃고, 쾌활하지 못하고 친절한 사람일 수 없게 진행되는 이야기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결혼을 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삶은 평온했다. 어머니는 책을 읽는 사람이라서 다른 세상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고, 그 상상력이 어머니의 야심을 키웠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에 대해서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그 야심에 부응해야 했다. 이 부부가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처음 했던 일이 양계업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양계업에 대한 묘사다.
"양계장 일에 어두운 이는 닭 한 마리에게 생길 수 있는 무수한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다. 닭은 달걀 하나에서 태어나 부활절 카드에 흔히 나오는, 조그맣고 털이 부숭부숭한 상태로 몇 주간을 보낸다. 그런 뒤 끔찍하게 털이 다 빠진 채 당신 아버지의 땀으로 사온 곡물 사료를 대량으로 먹어치운다. 그러고는 혓바닥 병이니 콜레라니 하는 등등의 질병에 걸려 멍청한 눈을 하고 태양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병들어 죽어버린다. 암탉 몇 마리, 그리고 때때로는 수탉 한 마리가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목적을 섬길 요량으로 투쟁을 거쳐 어른 닭이 된다. 그 암탉들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다시 다른 닭들이 나오면, 끔찍한 순환이 완성된다."
닭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다. 태내에서 아메바 같은 형체로 발생해 자라나다 세상에 나와 우리가 겪는 일들을 떠오르게 했다. 거의 태어나자마자 자립할 수 있는 동물들과 달리 오래도록 양육자의 보살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종의 연약함을 생각했다. 제 발로 걷기까지 그리고 제 힘으로 먹기까지 무수히 반복되는 보살핌의 나날들과, 또 그 이후로도 펼쳐지는 다른 종류의 보살핌에 대해 말이다. 그렇게 대단한 정성으로 자식을 키우며 부모들이 거는 기대와 기대가 보답받지 못했을 때의 실망에 대해서도.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을 읽으며 좀 알 것 같았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라고 있는 게 아니고, 그 마음대로 되지 않음에 대해 쓰는 게 소설이라고.
앞에서 말하지 않은 게 있다. 나는 아침마다 사과만 먹는 게 아니다. 달걀도 먹어 왔다. 사과 하나와 달걀 하나, 그리고 커피 한 잔. 십 년 가까이 이렇게 아침을 먹어 왔다. 맛도 맛이거니와 사과와 달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사과'라는 말과 '달걀'이라는 말이 좋다. 사과와 달걀의 형태와 색깔도 좋다. 사과와 달걀을 둘러싼 내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무수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도 좋다. 그러니까 어느 시인 식으로 말하자면, 사과와 달걀을 보고 있으면 온 세계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내게 달걀에 대한 산문과 소설이 각별히 와닿았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을 읽다가 내가 그토록이나 달걀에 집착하는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달걀은 인생이고, 순환이고, 지겨움이고, 환희이고, 남루함이고, 설렘이고, 끝이고, 시작이고, 시작의 끝이며, 끝의 시작인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은 이렇게 썼다. "나는 왜 달걀들이 존재해야 했는지, 왜 달걀에서 암탉이 나오고, 그 암탉은 왜 다시 달걀을 낳는지 생각해 보았다. (…) 내 생각에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달걀'을 읽고 나서 알았다. 나는 사과만으로는 아침을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달걀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에그 보일러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