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스티븐 그린블랫 지음|정영목 옮김|까치|464쪽|2만3000원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벽돌만큼 두툼한 성경책 앞부분의 단 몇 쪽을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첫 인류 이야기의 인상은 성경을 통틀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 못지않게 강렬하고, 문명사에 남긴 흔적은 예술, 문학, 철학, 과학 전 분야를 망라한다. 아담과 이브는 수많은 화가, 조각가들이 신의 완벽함을 표현하고자 할 때 떠올린 대상이었고, 중세 문학의 빛나는 주인공이었으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현실 밖으로 퇴출하고 싶어했던 남녀 1순위이기도 했다. 아담과 이브를 빼고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인 그린블랫 하버드대 교수는 아담과 이브가 유대인의 조상을 넘어 최초의 인류로 자리 잡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다왕국이 멸망하며 바빌론에 끌려간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신 야훼가 이교도 왕을 움직여 자신들을 벌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야훼는 신 중의 신이자 창조주여야 했으며, 아담과 이브는 정복자인 바빌로니아 왕에게도 조상이어야 했다.

그 후 아담과 이브는 곳곳에서 소환됐다. 노동, 질병, 고통, 상실과 그로 인한 애도로 황폐해진 마음을 들여다볼 때도 아담과 이브는 불려 나왔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두 남녀는 창조주에 대한 불복종, 죄와 그 결과로서의 벌을 사유케 하는 매개였다. '고백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욕을 원죄의 증거라고 여겼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아무 열정 없이 차분하게 짝짓기하도록 프로그래밍됐는데 최초의 부부가 죄를 지어 쫓겨나며 이를 망쳤다고 믿었다.

반 에이크 형제가 그린 아담과 이브.

이브는 여성 혐오에 동원됐다. 이브는 불행의 상자를 연 기독교 세계의 판도라였다. 사도 바오로조차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성경에 썼다. 13세기 한 탁발 수사는 "예전에 여자가 한 번 배우더니 온 세상이 뒤집혔다"며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를 비난했다. 마녀사냥은 그 인과응보였다. 드물게 이브를 예찬한 사례가 있지만 이단적 견해로 치부됐다. 1945년 이집트 룩소르에서 발견된 항아리 안에서 4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나왔다. '나그함마디 문서'로 명명된 이 문서에서 여자는 지식의 전파자이다. 아담은 아들 셋에게 "이브는 나에게 영원한 하느님의 지식의 말을 가르쳐주었다"고 고백한다.

눈으로 직접 봐야 믿는 게 인간 본성이다. "창세기에 표현된 대로 아담과 이브를 받아들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따랐던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은 두 남녀를 이미지화하는 데 종교적 열정을 불태웠다. 화가 뒤러가 1504년 제작한 동판화 '인간의 타락'은 유럽 전역에 수천 장이 뿌려졌다. 작품을 본 사람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이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게 됐다고 믿었다. 문학에선 밀턴이 '실낙원'에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서사시를 써서 두 남녀를 실재하는 인간처럼 표현했다.

군주정을 배척했던 밀턴은 에덴동산에서 자유를 누렸던 아담과 이브를 거론하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고 외쳤다. 밀턴으로 인해 두 남녀는 공화 정치 이념의 상징이자 혁명의 동반자가 됐다. 프랑스 신학자 라 페이레르는 더 나아가 '아담 이전 사람들'(1655)에서 "아담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아니다"며 인류 다원발생설을 주장했다. 노예주와 인종주의자들이 이 주장을 반겼다. 노예로 삼은 유색인은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를 신화의 영역으로 퇴각시키는 결정타는 다윈이 날렸다. 정작 다윈은 고뇌에 빠졌다. "밀턴과 바이런, 워즈워스 시에서 기쁨을 찾고 셰익스피어에서 즐거움을 맛보던 내가 시 한 줄 읽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고 푸념했다. 저자는 다윈의 고백을 전하며 신화로 회귀한 아담과 이브의 매력은 파괴되지도, 가치 없는 것이 되지도 않았다고 단언한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는 문학의 생명력이라는 독특하고 강렬하며 마법적인 현실성'이 있기 때문이며 '이 이야기가 없으면 우리의 존재가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