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초코?" 이 짧디짧은 대사 한 줄이 그토록 충격적일 줄이야. 이후 벌어지는 결말에는 한 방 얻어맞은 듯했다. 영화가 끝나고도 넋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으니. 세간의 의견처럼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화 '미성년'(2019)은 제목이 암시하듯 미성년보다 못한 성인을 꼬집는다. 어른들은 사고를 치고 허둥대며 해결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물론 한술 더 떠 솔직하지도 않다. 반면 아이들(주리와 윤아, 각각 김혜준·박세진 분)은 한마디 말없이도 전부 눈치를 채고 있으며 자기 앞가림도 잘할뿐더러 얽히고설킨 어른들의 문제 해결마저 한다. "알아?" "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이런 아이들의 선택이 어떻게 작위적일 수 있을까? 개봉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영화이니 내용은 여기까지만 밝히겠지만, 어쨌거나 영화의 두 주연 미성년이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현명함과 담대함의 방증으로서 전혀 무리가 없었다.
결말은 전혀 무리가 없었지만 우유는 그렇지 않았다. 결말의 전개에 한 방 얻어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에서도 답답함이 올라왔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영주(주리의 엄마, 염정아 분)를 제외한 어른들은 최대한 아둔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모자라 저런 '우유'를 먹이고 있구나. 무엇이 문제인가? 굳이 작은따옴표를 쳤듯 일단은 진정 우유라고 하기에 조금은 모자라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유는 소젖이지만 짜내자마자 바로 우리 입으로 들어갈 수 있지는 않다. 현대의 모든 식재료가 그러하듯 인간에게 안전하고 먹기 편한 상태를 반드시 거쳐야 식탁에 오를 수 있다. 가공 말이다.
우유의 가공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째는 균질화 과정이다. 산촌(山村)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초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에게서 당시 마셨던 갓 짜낸 우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유 급식 시간에 시중에서 파는 매끈한 게 아닌 걸쭉한 액체를 마신다는 것이었다. 맞는다, 소에게서 갓 짜낸 우유는 크림이 몽글몽글 덩이가 져 있는 불균일한 액체 상태다. 맛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크림의 지방 입자를 1마이크로미터 수준으로 미세하게 부순다. 그 결과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소젖보다 밀도가 더 낮은 미세한 지방 알갱이가 떠 있는 물, 그게 바로 우유다.
둘째는 살균이다. 인간에게 해로운 균을 잡는 과정으로 핵심은 열 처리다. 오랫동안 우유의 살균은 고온으로 가열하는 '초치기'가 대세였다. 130도 이상의 높은 열로 짧게 2초 동안 처리하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살짝 익힌 듯한 맛이 난다. 그나마 '익힌 것 같다'고 비교할 대상이 등장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우유의 신선함을 살린다'고 주장하는 63도 30분의 저온 살균 우유가 처음 등장한 게 1987년. 그전까지는 '우유는 다 이런 건가 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마시고 살았다. 저온 살균 우유는 이제 자리를 잡아 요즘은 130도와 63도의 중간인 72~75도(살균 시간 15초)도 일정 수준 시장의 지분을 확보했다. 한편 사족처럼 언급해주지 않으면 서운한 멸균 우유도 있다. 130도 이상의 초고온에서 처리해 명칭처럼 균을 완전히 죽였으므로 개월 단위로 상온 저장이 가능하다. 물론 신선한 맛은 전혀 없다.
딸기·초코·바나나 등 소위 '맛 우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과정을 마친 우유에 맛을 섞는 걸까? 전혀 아니다. 맛 우유의 정체는 수분을 걷어내 가공한 가루, 즉 분유에 물을 타서 만든 '환원유'이다. 가공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에게서 나온 액체라는 정체성은 유지하는 게 흰 우유라면, 환원유는 그보다 훨씬 덜 진할 뿐만 아니라 멸균 우유에 비해서도 우유 특유의 신선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이런 단점을 가리기 위해 딸기든 초코든 맛(사실은 합성 착향료와 색소)과 설탕을 환원유에 더한다. 쉽게 말하자면 분유에 물을 타서 우유의 흉내를 낸 뒤 빈 공간을 향이나 색소, 설탕으로 메우는 것이다.
합성 착향료와 색소 등이 문제라는 말인가? 일반적으로는 아니다. 음식에 따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첨가물을 쓸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더한 '우유'가 아이들을 위한다는 존재 이유를 다 하고 있느냐는 이야기다. 환원유는 일반 우유보다 영양적 가치가 떨어지니 아이들에게 딱히 이로울 게 없으며, 우유가 부족해서 만드는 제품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유가 남아돌기 때문에 조금씩 시장에서 세(勢)를 불려 나가고 있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새로운 맛의 '우유'가 등장했다 하면 백이면 백 환원유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우유가 수요와 공급 법칙을 초월해서 생산되고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소비가 줄어드는데 생산은 계속한다. 게다가 비싸다. 1L당 1050원대로 일본과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원유 가격에 유가연동제까지 맞물려 은근히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무엇보다 맛이 없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세계 각국을 돌며 우유를 마셔본 음식평론가로서 말할 수 있다. 고소하고 풍성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우유가 많다. 한국의 우유는 정반대로 맛의 표정이 또렷하지 않고 무겁다. 평소 즐겨 찾지도 않는데 맛없고 비싸기까지 하다니. 결국 고육지책으로 장기 보관이 가능한 환원유 제품군을 늘린다. 한술 더 떠 영양분 섭취를 명목으로 학교에서 준(準)강제 급식을 추진하니 3교시쯤 되면 구토하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영화 속 아이들에게 한 교사는 "너희들 그러다가 큰일 나!"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거짓말"이라며 학교를 떠난다. 영화 속 아이들은 이미 다 간파했지만 또 다른 어른들의 거짓말인 환원유는 아직 훌륭하게 아이들을 속이고 있다. 백번 양보해 썩 맛있지 않은 우유는 그래도 진짜라고 쳐 준다지만, 환원유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은 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초등학교 한 반에 학생이 채 열 명도 안 되는 학급도 있다고 한다. 인구가 줄고 아이들이 귀해진 시대라면 흰 우유에 진짜 초콜릿이나 딸기·바나나 등의 재료를 더한 진짜 '맛 우유'를 먹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