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에 모인 앙상한 그림자들, 벌겋게 살갗이 벗겨진 인체, 울부짖듯 만개하는 사과나무 꽃….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가 굵은 선으로 그려낸 사실주의적 구상화(具象畫) 앞에서 관람객들이 저마다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림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를 느낄 것이다." 그림 앞에서 셀린 레비(48) 베르나르 뷔페 재단 이사장이 말했다.
올해 뷔페 20주기를 맞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국내 처음 개최되는 대규모 회고전 참석차 한국을 찾은 셀린 레비는 뷔페와 50년 넘게 교류하며 작품을 다뤄 온 프랑스 화상(畫商) 모리스 가르니에(1920~2014)의 외손녀다. 가르니에 부부, 뷔페가 입양한 세 자녀와 더불어 2009년 재단을 설립했다. "어릴 적부터 집 곳곳에 뷔페의 그림이 걸려 있어 그의 그림 안에서 자랐다"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시작한 전시는 호평 속에 순항하고 있다. 화가로 활동하는 배우 하정우가 사모하는 작가라는 입소문을 듣고 방문한 관람객도 다수였다. 개막 이후 포털사이트에는 "복제품이라도 집에 걸어두고 싶다" 같은 감상평이 줄줄이 달렸다. 전쟁과 궁핍, 어머니의 죽음을 견디며 "살기 위해 그린다"고 고백했던 이 화가의 그림을 본 뒤, 한 네티즌은 "인생에 회의가 든다면 전시장에 가보라. 어디론가 전력 질주로 당신을 안내할 것"이라고 썼다.
20대에 프랑스 화단을 평정하고, 앤디 워홀이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유명한 화가일 것"이라 극찬한 뷔페였으나, 레비가 기억하는 그는 "부끄럼 많은 덩치 큰 남자"였다. "말수가 적었고 그의 작업실에 드나들 수 있는 이도 극소수였다. 키가 크고 퉁퉁한 편이었는데 워낙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대스타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전시장에 들어설 때면 존경의 표시로 군중이 옆으로 쫙 갈라졌다.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구상 회화의 왕자'라는 별명처럼, 8000점 가까운 유작 모두 구상이다. 이번 92점의 전시작 역시 마찬가지. 시대는 추상화로 완전히 넘어갔고, 이후 평론가들의 외면 속에서도 "나를 둘러싼 증오는 내게 주는 훌륭한 선물"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레비는 "그에게 그림은 살아오며 직면한 모든 일상의 총체였던 것 같다"며 "그럼에도 스타일의 변신을 멈추지 않았고 비참한 인간의 초상부터 정물·풍경화, 문학 작품의 미술적 변주까지 폭넓어 매번 다른 디테일에 놀라게 된다"고 했다. 재단은 뷔페의 20주기를 맞아 전작 도록(카탈로그 레조네) 첫 권을 오는 10월쯤 발간할 계획이다. "그는 더욱더 발견돼야 할 화가임에 틀림없다."
10일 개막식에는 레비 이사장을 비롯해, 전시 홍보대사인 배우 황보라, 장 크리스토프 플러리 프랑스문화원장, 김순구 대한감정평가사협회장, 김종근 미술평론가, 신완선 성균관대 교수, 박민정 예술의전당 본부장, 이명렬 한국라이온스협회 고문, 변선근 한솔BBK 대표, 주용태 조선일보 문화사업단장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