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테크발 신(新)냉전'은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양상이 다르다. 국경이 없는 시대인 만큼 재래식 무기(武器) 대신 차세대 신기술과 소프트웨어(SW)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신경망(網)을 장악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식이다. 양국은 우주, 군사, 지식재산권, 데이터(data) 등 주요 분야에서 2강(强) 체제를 구축하고 세계 각국에 '어느 편이냐'를 묻고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이번 무역 전쟁은 단순히 5G(5세대 이동통신)나 테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 패권 전쟁의 일부"라며 "유럽·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 중국과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미국 간 양보할 수 없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는 최근 '새로운 형태의 냉전(A new kind of cold war)'이라는 기사에서 "패권 전쟁에 따라 중국이 미국 질서에 완전히 종속되거나 미국이 밀려나 쇠락하는 결과를 맞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 외교 전문가는 "세계 각국이 줄 서기에 나서면서 전 세계에 보이지 않는 철의 장막이 또다시 펼쳐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중국 인민일보 등은 현 상황을 '디지털 철의 장막(digital iron curtain)'이라고 표현했다.

◇미·중이 세운 '디지털 철의 장막'

화웨이 제재를 계기로 세계는 미국과 중국 양편(兩便)으로 빠르게 나뉘는 중이다. 5일(현지 시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웨이가 러시아 최대 통신업체와 5G망 구축 계약을 체결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두 정상은 이날 10억달러 규모의 공동 과학기술 혁신펀드 조성 등 과학기술 분야 협력은 물론 농업·금융·무역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러시아, 시진핑 앞에서 화웨이 5G 계약 - 5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궈핑(왼쪽) 화웨이 부회장과 알렉세이 코르냐 MTS 최고경영자(CEO)가 5세대 이동통신(5G) 장비 계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뒤편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박수를 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신흥 국가를 중심으로 세(勢)를 키우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오는 14~15일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열리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참석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비롯한 회원국 정상을 만날 계획이다. 왕치산 중국 국가부주석은 지난달 파키스탄에 이어 네덜란드·독일 등을 연이어 방문했다. 동남아시아 국가 상당수는 중국 편으로 기울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난 4월 화웨이 5G 장비를 쓸 것이라고 밝혔고, 태국도 2020년까지 5G 서비스를 선보이기 위해 화웨이와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중동·동유럽의 국가들 역시 화웨이 장비 도입에 긍정적이다.

미국은 백악관 고위 관리와 동맹국 주재 대사(大使)를 중심으로 '미국 편'에 설 것을 압박하고 있다. 5일(현지 시각) 피트 훅스트라 주(駐)네덜란드 미국 대사는 네덜란드 정부에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훅스트라 대사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글로벌 기업가 정신 정상회의'에 참석해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나쁘고, 나쁜 생각일뿐더러 나쁜 방향"이라고 했다. 'bad(나쁜)'란 단어를 세 번이나 썼다. 그는 "시스템이 화웨이 것일 경우 중국 정부가 데이터를 가져간다"며 화웨이 장비 도입의 전면 금지를 요구했다. 지난 3일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서유럽 국가를 방문해 '반(反)화웨이' 전선 동참을 요구했다. 일본·뉴질랜드·호주 등 전통적인 미국 동맹국들은 속속 '화웨이 장비 배제'에 동참하고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선 한국

30년 가까이 지속돼온 미국 중심의 다극화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은 한국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중 어느 쪽을 택하든 상대 진영의 반발과 정치·경제적 손실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중은 노골적으로 즉각적인 자국 진영 지지를 요구하고 있다. 시간을 끄는 데 대한 양국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 정부는 기업이 상업적으로 화웨이와 협력하든 하지 않든 엄중한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며 "신냉전은 과거의 냉전과 달리 확실하게 편이 갈리지 않고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만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배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전통적 한·미 동맹의 틀을 유지해야 하지만 일본·호주처럼 미국 편에 완전히 서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면서 "안보와 실리를 동시에 고려하는 영국의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