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0년이 지났나요? 교구장이 된 게 어제 같은데요. 하하!"
오는 29일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는 천주교 안동교구의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90) 주교는 23일 오전 "지난 50년 세월을 돌아보며 느끼는 것은 단 하나, 감사"라고 말했다. 고령에도 현 교구장 권혁주(64) 주교와 함께 경북 안동교구청에서 기자들을 맞은 그는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 이토록 큰일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한다"며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의 산증인.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스물다섯 나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왔다. 당시 한국에 대한 유럽의 인식은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두봉 주교의 친구 또한 6·25전쟁에 파병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한국은 "꼭 가고 싶은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만큼은 주님의 은총을 전하고 싶었다"는 그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두 달 반 동안 배를 타고 머나먼 이국 땅에 도착했다. "60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느냐"며 너스레를 떨던 두봉 주교는 "인천 제물포항에 내렸을 때 마주한, 다 부서진 건물에 살고 있던 비참한 사람들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대전 지역에서 15년간 사목하던 그는 1969년 안동교구가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첫 교구장 자리는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교황청에 '못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전 외국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주교 회의에서 끝까지 저를 시키길래 두 손 들었습니다."
두봉 주교의 철학은 '열린 교회를 만들자'였다. 그의 지도로 안동교구는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 최대 규모였던 6층짜리 문화회관 건물을 세웠고, 병원(영주 다미안의원)과 전문대학(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했다. 농민회관과 학생회관도 만들었다. 두봉 주교는 그렇게 안동 주민이 되어갔다. "양심적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유림(儒林)들과 참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안동은 유교 전통이 짙은 곳이었어요. 사람들에게 처음 인사할 때 공자님 말씀을 외워 갔더니 금방 친해졌습니다(웃음)."
안동교구청을 '농촌 사목의 대명사'로 만드는 데에도 두봉 주교의 역할이 컸다. 프랑스 오를레앙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농민의 후손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안동의 산골 공소(公所)까지 찾아다니며 농민들의 살림살이를 챙겼다. 1979년에는 군청에서 나눠 준 불량 씨감자 때문에 농사를 망친 농민들을 대표해 항의에 나섰다가 강제 추방당할 뻔하기도 했다. 지금도 경북 의성에서 70평 텃밭을 가꾸며 사는 그는 "사람들을 먹고살게 해주는 농업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두봉 주교는 지난 1990년 안동교구장을 사임했지만, 농민들의 소박한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현 교구장인 권혁주 주교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권 주교는 취임 후 사목 표어로 '기쁘고 떳떳하게'를 내걸었다. '주님 말씀대로 기쁘고 고맙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가자'던 두봉 주교의 50년 전 취임사에서 가져온 말이다. 신자 5만여 명의 안동교구는 현재 한국 천주교 16교구 중 규모가 가장 작다. 그러나 권 주교는 "작고 가난한 교구라서 더 행복하다"고 했다. 안동교구의 지난 50년은 '가난의 영성(靈性)'을 써 내려간 역사였다. 그는 "가난을 함께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신앙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서로를 도우며 살았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두봉 주교에게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꿈에도 생각 못 할 만큼 많은 변화를 겪은 나라"였다. 그러나 두봉 주교는 우리 삶에서 기쁨을 주는 건 물질적 풍요가 아닌 양심이라고 했다. "기독교든 유교든 불교든 상관없어요. 사람은 양심대로 살아야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