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현지 시각) 프랑스 서부 연안 도시 낭트(Nantes)의 ‘핫플레이스’로 불리는 낭트섬(Ile de Nantes)의 한 카페. 카페 테라스에서 여유롭게 독서를 하거나, 낭트섬을 구경하다 잠시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들어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과거 코트디부아르에서 싣고 온 바나나를 익히던 창고로 쓰였던 건물을 허물지 않고 개조해 만든 곳이라고 했다. 같은 건물엔 식당, 전시관, 클럽까지 입주해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낭트의 명소 기계동물 테마파크 ‘레마신 드릴(Les Machines de l’Ile·섬의 기계들)’이 있다. 광장을 거닐던 12짜리 거대 코끼리가 물을 뿜어대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옆엔 쥘 베른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바다 생물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코끼리와 회전목마 모두 예전 이곳에 자리하던 공장에서 쓰던 고철·폐목재·가죽 등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처럼 낭트섬에선 버린 것이 없다. 과거 산업 유산이 창의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보존되고 있었다.

원종환 탐험대원과 장마르크 에로 전 낭트 시장. /김선엽 기자

낭트를 ‘도시재생의 교과서’로 만든 건 장마르크 에로(Ayrault) 전 낭트 시장이다. 2014년까지 프랑스 국무총리를 지냈고,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프랑스 정계 거물이다. 그러나 낭트에 대한 그의 애정은 특별했다. 1989년부터 지난 2012년까지 무려 23년간 낭트 시정(市政)을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행됐던 도시재생사업도 그가 이끌었다. 현재의 낭트가 ‘에로 전 시장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날 낭트섬 물류창고를 개조해 도시재생사(史)를 전시하는 ‘앙가르32’에서 만난 에로 시장은 "낭트의 도시재생사를 설명하는 일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겹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당선 전만 해도 낭트는 탈산업화가 휩쓸고 간 우중충한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다. 삼각 무역이 활발하던 18세기 노예무역의 중심지였고, 조선업과 제조업이 들어선 19세기 프랑스 경제의 핵심축으로 부상했던 화려한 과거도 있지만, 1970년대 이후 산업 구조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소가 떠나고 제조업이 사라졌다. 실업자가 발생하고 인구가 급감했다. 1968년 265만명이었던 인구는 1980년대 초반 240만명으로 줄었다. 연일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던 공장들로 가득했던 낭트섬 일대는 1980년대 들어 황무지로 변했다. 루아르강(江)을 사이에 두고 낭트섬은 구시가지와 단절됐다. 폐공장만 남겨진 낭트섬을 찾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폐공장이 밀집했던 낭트섬을 되살리는 일은 1980년대 말 낭트시(市)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성당과 중세성 등 역사유적이 많은 구도심은 재개발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로 시장은 "1989년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장들을 전부 밀고 국제물류센터를 짓는 낭트섬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당선 후 이를 백지화하고 재생사업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낭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산업 유산들을 보존하는 일이 낭트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 내린 결정이었다"며 "다른 도시와 차별성 없는 재개발 사업으로 그렇고 그런 도시로 만들어 놓으면 누가 낭트까지 일부러 찾아오겠느냐"고 했다.

에로 시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저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Perrault)와 도시계획 전문가 알렉상드르 슈메토프(Chemetoff)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에게 연구 용역을 맡겨 세밀하고 신중한 도시재생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도시 재생사업에서 ‘기다림’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당선 직후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시민들의 삶을 오래도록 좌지우지할 재생사업을 성급히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웃나라 스페인 빌바오의 도시재생 사례에서 영감을 얻었다. 1997년 완공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빌바오는 쇠락의 늪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에로 시장도 낭트 도시재생의 답을 ‘예술’에서 찾았다. 다만, 빌바오와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미술관 건립 대신, 낭트섬에 버려진 공장과 창고를 갤러리와 전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바나나창고는 전시관과 카페가 되고, 일부 공장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도 쓸 수 있게 했다. 프랑스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창작활동 그룹 ‘로얄 드 뤽스’도 낭트섬에 유치했다. 상상력 가득한 ‘레마신 드릴’도 로얄 드 뤽스의 작품이다. 낭트섬을 아예 ‘예술창조 클러스터’로 만들었다. 그랬더니 예술 관련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낭트섬에 입주하기 시작했다. 에로 시장과 뜻을 함께한 장 블레즈 감독이 1990년대 초반부터 ‘페스티벌 데잘뤼메(환한 도시들의 페스티벌)’와 ‘에스튀에르 비엔날레’를 연속 유치하면서 낭트는 ‘예술 도시’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삶과 단절됐던 낭트섬 둘레 길에 산책길이 조성됐다.

에로 시장은 "구도심의 주요 인프라를 낭트섬으로 옮기는 일이 재생사업의 마무리라고 생각했다"며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에 의뢰해 새 법원 건물을 낭트섬에 지었다"고 말했다. 예술학교, 디자인학교 등 대학들도 낭트섬에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젊은 인구가 유입되고 상권이 살아났다. 낭트종합병원을 낭트섬으로 이전하는 큰 사업이 2022년까지 추진될 계획이다.

그는 "무엇보다 4번 연속 시장에 당선돼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프랑스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의 득표율은 5.73%로 전 선거(2008년)보다 4%포인트 하락했다. 당시 집권 여당으로서 참패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에로 시장은 "내가 시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같은 사회당(PS) 출신 조안나 롤랑이 당선된 걸 보면 우리가 추진해온 도시재생사업이 낭트 시민들의 인정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낭트 명물 기계 코끼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원종환 탐험대원과 본지 김선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