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잉글랜드 프로축구 첼시와 토트넘의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열린 런던 스탬퍼드 브리지 경기장. 그라운드에 토트넘의 손흥민이 보였지만 이날만큼은 목 터져라 손흥민 응원에만 열 올릴 수 없었다. 세계 최대 축구 데이터 분석업체인 영국 옵타(OPTA)의 '일일 분석관'을 맡았기 때문이다. 과제는 간단했다. 주요 선수들의 동작을 무릎 위 컴퓨터에 입력해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것이다. 이날 나는 컴퓨터에 손흥민에게 달라붙는 첼시 선수들의 빈도, 손흥민 동료 무사 시소코의 전진 패스 횟수 같은 정보를 입력했다. 컴퓨터의 '조수'로 일한 셈이다.

지난달 28일 영국 런던 스탬퍼드 브리지 경기장에서 축구 통계 업체 ‘옵타’의 일일 분석관이 된 박재웅씨가 첼시와 토트넘의 경기를 보는 모습.

옵타는 그동안 수치화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던 축구의 여러 변수를 컴퓨터 데이터로 바꿔 전략적 해석을 내린 뒤, 이를 고객인 축구팀에 보내주는 기업이다.

패스의 형태와 빈도, 공수 전환, 압박 형태 등을 모두 컴퓨터가 읽어낼 수 있는 데이터로 변환한다. 아직은 인간이 수치 입력을 도와줘야 하지만 옵타는 3~4년 안에 AI(인공지능)가 경기 상황을 자체적으로 수집해 전략을 도출하리라고 전망하고 있다.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는 게 경기 내용만은 아니다. 체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공에 반응하는 속도가 무뎌지는지, 상대편과 충돌했을 때의 충격같이 선수의 '몸'도 실시간으로 측정돼 데이터로 바뀐다.

손흥민도 종종 입고 훈련하는 '캐터펄트' 조끼는 GPS(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로 선수의 이동 경로·속도를 수집하고 심박수, 균형 감각, 신진대사량까지 모은다. 몸에 밀착하는 이 얇은 조끼가 선수 자신도 알기 어려운 정보들을 1초당 약 1000개를 수집할 수 있다고 한다. 축구 경기는 90분 남짓이다. 경기당 한 선수로부터 540만개, 한 시즌(보통 38개 경기)당 2억520만개에 달하는 데이터를 컴퓨터가 모아 축구를 '열공'하고 있다는 얘기다. 세상엔 200여 개 축구 리그가 있는데! 그런 데이터를 집어삼킨 컴퓨터가 전략을 짜고 스카우팅을 하는 'AI 머니볼 축구'의 세상은 영국에서 이미 현실이었다.

나는 이날 수많은 정보를 입력했지만 두 팀의 경기가 끝나고 내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단출했다. '첼시 2대0 승리, 손흥민이 슛을 한 번밖에 못 함.' 격렬한 경기에 너무 흥분했지 싶다. 그러나 영국 리즈의 축구 데이터 분석회사 '옵타'의 컴퓨터들은 달랐다. 우리를 안내한 피터 딜리 매니저가 '손흥민이 볼을 터치하는 장면'이라고 입력하자 관련된 이날 경기 장면 20여 개가 순식간에 나왔다. 손흥민이 동료들과 주고받은 패스 횟수도 화면에 함께 보였다. 딜리씨는 말했다. "손흥민이 볼을 가장 많이 주고받은 선수는 크리스티안 에릭센이군요. 해리 케인과는 패스가 눈에 띄게 적었고. 우리는 이런 데이터를 그대로 구단에 제공합니다. 이를 어떻게 쓸지, 판단은 그들의 몫이겠지요."

옵타가 만들어진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축구는 데이터 축적과 거리가 멀었다. 맨유의 수퍼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한 해 패스를 몇 개나 했는지 집계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축구도 빅데이터와 AI의 영역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리즈에서 만난 옵타의 니컬러스 이아메스 선임조사관은 "매년 11만 개 경기를 분석한다"고 말했다. "한국 K리그도 우리가 다 들여다보고 있어요. 전 세계 축구 선수가 뛰고 슛하고 막고 패스하는 그 현장이 데이터라는 컴퓨터의 언어로 바뀌는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첼시·토트넘 경기가 끝난 뒤 옵타는 '고객사'인 토트넘 구단에 300쪽이 넘는 분석 보고서를 주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3시간 만에 완성된다. 그 분량을 그냥 키보드로 친다고만 생각해도 손가락이 욱씬거린다.

'1세대' 축구 데이터 분석 회사인 옵타 외에도 21번 클럽(21st Club), 스탯스포츠(STATsports) 같은 기업이 최근 여럿 생겼다. 관련 산업이 빠르게 팽창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다. 구단주의 '직관'에만 의지하기엔 축구 선수의 몸값(이적료만 수천억원을 오갈 정도로)이 너무나 비싸졌다. 냉철한 분석력과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보력으로 팀에 필요한 선수를 찾아내야 한다. 21세기 최첨단 기술인 빅데이터와 AI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화끈한 성공 사례도 이미 나왔다. 지난해 데이터 분석회사 21번 클럽의 컴퓨터는 키프로스 리그에서 뛰던 로렌조 에베칠리오를 세르비아 클럽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의 새 미드필더로 추천했다. 구단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선수였단다. 컴퓨터를 믿어본 베오그라드는 에베칠리오의 활약을 앞세워 올 시즌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해 중계권료를 왕창 챙기고 대박이 났다. 21번 클럽의 오마르 차우드후리 팀장은 "우리 프로그램은 '당신이 좋아할 만하다'며 영화와 드라마를 추천해주는 넷플릭스의 축구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딜리씨는 "바둑 기보 3000만 건을 분석해 이세돌을 격파한 '알파고'의 아버지 구글이 얼마 전 옵타가 15년 동안 작성한 축구 통계와 경기 영상을 구입해 갔다"고 했다. 인간이 지금까지 알지 못한 '이기는 축구'의 깜짝 놀랄 만한 묘수가 등장할지 모르겠다.

선수의 '동물적 본능'을 사랑하는 축구팬들은 AI 축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딜리씨는 (인간 입장에선) 낙관적 전망을 내놨다. "데이터 축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해법을 찾아내는 건 사람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하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인간 감독 대신 데이터로만 판단하는 냉철한 '터미네이터 퍼거슨'과 '로보캅 모리뉴'가 경쟁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초등생 데이터까지 모으는 영국 축구의 저력… 한국도 꼭 도입해야"

저는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 초등학교에 들어간 '월드컵 키즈'입니다. 그 또래 다른 어린이들처럼 축구선수를 꿈꿨습니다. 제2의 박지성을 목표로 열심히 공을 찼지만 태어나자마자 받은 심장 수술이 발목을 잡아 꿈을 접었습니다. 직접 뛸 수 없다면 축구를 분석하고 해설하는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고 언론정보학을 공부하는 23세 대학생입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대한축구협회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우리나라 지방 곳곳의 초·중·고 축구 리그를 직접 접했습니다. 대부분 현장에는 과학적 분석 시스템이라고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카메라로 찍은 경기 영상을 되풀이해 보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방문한 영국에서는 학생들이 방과 후에 1~2시간만 공을 차도 코치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천 가지 다른 종류의 데이터를 모았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골을 넣지 못하고 경기에 지더라도 데이터를 분석해 '칭찬할 만한 모습'을 보인 장면을 찾아내 계속 독려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영국에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스포츠는 하나의 생물입니다.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고 혁신해야 합니다. 한국 축구에도 영국처럼 최신 기술을 접목시킨다면 새로운 혁신이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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