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공헌한 기업들이 주목받는 가운데,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의 가계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조부 신예범, 백부 신용국, 선친 대산(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신창재 회장의 조부 신예범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야학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항의하는 소작쟁의를 주동하다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신용호 창업주 큰 형인 신용국 선생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무 살 때 3·1만세운동에 뛰어든 후 호남 지방 항일운동을 이끌다 여러 차례 투옥됐고 출옥 후에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객지로 떠돌았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집에서 독학으로 초중고 과정을 마친 신용호 창업주는 '천일독서(千日讀書)'를 통해 책 100권을 정독하고, 시장과 부두 그리고 관공서를 둘러보는 현장학습으로 세상을 깨우친 것으로 유명하다.

스무 살에 중국으로 넘어온 신용호 창업주는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많은 독립운동가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특히 민족시인 이육사를 만나면서 국가와 민족에 눈을 떴다.

신용호 창업주가 반드시 큰 사업가가 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내놓겠다고 하자, 이육사는 "대사업가가 돼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라며 격려했다. 신용호 창업주는 1940년 베이징에 '북일공사'를 설립해 곡물 유통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때 얻은 이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1981년 6월 1일 교보문고 개장기념식에서 이병철 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신용호(왼쪽) 창업주.
1987년 7월 천안 계성원(교보생명 연수원)에서 열린 '제23차 세계보험협회(IIS) 연차총회'에서 세계 보험 리더들과 환담하는 신용호 창업주(오른쪽 두 번째).

'아Q정전' 작가 루쉰의 영향을 받은 이육사는 신용호 창업주에게 사업의 중요성과 사업가의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고 전해진다. 신용호 창업주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자본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교육이 민족의 미래'라는 신념으로 교육보험 사업을 결심하고 교보생명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이라는 창립 이념에는 이육사 등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오랜 기간 숙고한 흔적이 담겨있다. 그의 창립철학은 교육보험, 교보문고, 교보교육재단, 대산문화재단을 통해 국민교육진흥의 구현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창재 회장은 1996년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에서 교보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부친의 설득이 주효했다. 새롭게 일생을 바칠 무대가 학교와 병원에서 경영 현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2000년 대표이사에 오른 뒤 대대적인 혁신으로 국내 생명보험업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관행으로부터 변화를 선도했지만, 선대가 일궈놓은 창업정신의 계승에는 더 적극적이었다.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의 현대적 재해석과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교보교육재단과 함께 체험중심, 인성개발, 지혜함양의 방법을 통해 참사람 육성을 표방한 '체-인-지 리더십 프로그램'은 국민교육진흥의 미래의 방향성을 읽게 한다.

신창재 회장은 신용호 창업주가 1996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데 이어 22년 만인 2018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산업 발전에 기여한 기업인이지만, 문학과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예술인 부자가 세운 전대미문의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