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마약왕 ‘엘 차포’가 미국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87년 미국 검찰에 기소된 이후 약 32년 만에 미국 사법부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멕시코 마약왕 엘차포의 본명은 호아킨 구스만(61)이다. 168cm의 다소 작은 키 때문에 ‘땅달보’라는 의미인 엘 차포(El Chapo)로 불리게 됐다. 구스만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아편을 키우며 마약 시장에 발을 들여 놓았다. 돈으로 경찰과 정부 관료를 매수하고 자신의 눈 밖에 난 자들을 죽음으로 응징하는 무자비한 방식으로 멕시코 최대 마약 범죄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의 수장에 올랐다.
구스만은 미국 검찰에 기소된 이후 약 30년간 미국 및 멕시코, 인터폴(국제형사기구)이 3번의 체포, 2번의 탈옥이라는 추격전을 벌인 끝에 최상의 보안 수준인 뉴욕 맨해튼 남부 연방 교도소에 투옥됐다. 덕분에 미 FBI가 선정한 ‘세계 10대 지명 수배자’ 명단에 2번 연속 이름을 올렸고,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4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구스만은 한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이슬람국가)가 중동 내 마약거래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IS에 "부숴버리겠다"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이제 그는 남은 생을 미국 교도소에서 보낼 운명에 처했다.
◇ ‘폭력 아버지’에게 쫓겨나 마약 조직계 입문한 소년
구스만은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멕시코 서북부 시날로아주(州)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장을 운영하고 가끔 아편을 재배해 수입을 얻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술과 도박 등에 쓰였다. 어린 구스만은 매일 밤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맞았고, 십대가 됐을 땐 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대신 맞았다.
십대 후반에 집에서 쫓겨난 구스만은 마약 거래를 시작했다. 교육 한 번 제대로 받은 적 없던 구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버지에게 보고 배운대로 마약을 재배해 파는 일이었다. 이후 구스만은 1970년대부터 마약 밀매 조직에 들어가 콜롬비아 등지에서 재배된 마약을 미국으로 밀반입하는 일을 맡았다. 구스만은 당시 멕시코 최대 마약 밀매 조직인 과달라하라 수장으로부터 뛰어난 사업 수완과 열정을 인정 받아 예상보다 어린 나이에 중책에 올랐다.
조직의 수장이 경찰에 체포돼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자 구스만은 재빠르게 기회를 잡았다. 남은 조직원들과 지금의 최대 마약 밀매 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인 마약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그는 1990년 한 호텔 로비에서 콜롬비아 코카인 공급상과 향후 사업을 담판 짓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마약 수송비의 40%만 주면 전 세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미국에 수송하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 돈·살인으로 세운 ‘마약 왕국’
구스만은 자신의 ‘시날로아 카르텔’을 세계 최대 마약 조직으로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멕시코 각지의 마약 밀매 조직 수장들을 불러들여 조직의 몸집을 키웠고, 마약을 미국으로 밀반입할 항공조종사와 운전사, 보안 통신을 위한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향후 그의 부하 조직원들이 미국 법정에서 증언했듯 구스만의 조직은 하나의 ‘기업’과 같았다.
구스만은 돈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매수했다. 보안요원들을 고용해 마약 수송 과정과 조직의 지도부를 경호하도록 했다. 이들은 스페인어로 암살자라는 의미인 ‘시카리오(sicario)’로 통했다. 시카리오들은 구스만의 명령에 따라 조직의 적을 폭행, 납치, 살인했다. 뿐만 아니라 구스만은 정부 관료와 경찰에게 뇌물을 건네 적발을 피하기도 했다.
구스만은 미국에 가장 많은 마약을 판매하는 조직이 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였다. 미국 보안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통조림을 제조한 뒤 그 속에 마약을 숨겨 유통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침대 밑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 금고를 보관했고, 대금을 받으러 갈 때는 개인 전용기로 움직였다.
미국 검찰은 구스만이 마약 밀매 과정에서 수천명에 대한 살인을 지시하고, 140억달러(약 15조7000억원)으로 추산되는 재산을 모은 뒤 은닉했다고 보고 있다.
◇ 3번의 체포, 2번의 탈출 끝에 유죄 선고
구스만은 1987년부터 미국 사법당국의 감시망에 들어왔다. 당시 미국 검찰은 구스만을 살인교사 및 마약 밀매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구스만을 미국 법정에 세우기까지 약 32년이 걸렸다.
구스만은 1993년 멕시코 경찰에 체포됐으나 2001년 1월 빨래 바구니에 숨어 탈옥했다. 교도관에 뇌물을 쥐어 준 덕분이었다. 이후 2014년 2월 재수감됐으나 2015년 7월 1.5km나 떨어진 교도소 밖 건물까지 땅굴을 파 탈옥했다. 2번의 탈옥으로 이미 그는 세계적인 수배자가 됐다.
멕시코와 미국, 콜롬비아, 인터폴의 치열한 추격전 끝에 구스만은 2016년 1월 체포돼 2017년 1월 미국으로 송환됐다. 구스만이 살인죄를 인정받을 경우라도 사형집행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송환 직후 구스만은 첫 재판에서 17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구스만은 2014년까지 미국 각지에서 200t이 넘는 마약을 밀매하고 살인교사, 돈세탁, 불법 무기 소지 등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구스만은 12일 (현지 시각) 뉴욕 브루클린 연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배심원단으로부터 10개의 혐의를 인정받아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이날 그의 조직원 50여 명이 나서서 그의 범죄를 증언했다. 형 선고일은 6월 25일로 리처드 도너휴 뉴욕 동부지검 검사는 구스만이 사면 없는 종신형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구스만이 수감된 교도소는 세계 최상의 보안 수준인 뉴욕 맨해튼 남부 연방 교도소다. 구스만은 변호인 접견 1시간을 제외한 하루 23시간을 독방에서 지낸다. 구스만은 마지막으로 체포돼 미국으로 송환되기 한 달전에도 탈옥을 계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검찰은 "구스만은 그의 범죄에 대답을 해야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피하고 싶어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