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교수를 원했지만 논문이 어렵다고 배제되고, 이혼과 실연을 겪고, 평생 고학력 실업자로 살지만 몸에 밴 부르주아 취향은 못 버리고,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20세기의 불행을 덤터기 쓰고 막다른 상황에서 자살한 사람, 바로 철학자 발터 베냐민(1892~1940)이다.
19세기 후반 제조업 활기로 호황을 맞은 독일 경제는 20세기 들어서도 장밋빛 기대 속에 있었다. 아버지 에밀 베냐민의 양탄자와 고미술품 사업은 번창했다. 1906년 방탄 비행선이 이륙하는 걸 보려고 공항에 인파가 모이고, 발터 베냐민의 부모는 '독일 예술 백년전'을 보려고 국립미술관을 찾았다. 그해 에나멜가죽 구두를 신고 세일러복을 입은 발터 베냐민과 동생은 치펜데일풍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서고, 어린 여동생은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베냐민은 유대인 가정에서 '기발한 생각을 잘하는 외톨이, 극도로 자기 중심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유년 시절이 끝나자 '피의 20세기'로 내동댕이쳐졌다. 1930년대 유대인 예비 검속과 함께 직업 활동이 금지되고, 유대인 50만명이 독일을 떠났다. 1933년 말 베냐민은 파리의 이민자 무리에 섞여 구호위원회에서 원조를 받으려고 줄을 섰다. 가난 속에서 '일방통행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등을 썼다. 잡지 원고료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보내주는 돈을 아껴 쓰며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방대한 사료와 도판을 토대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써나갔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베냐민은 다시 망명을 결심한다. 1940년 9월 24일 베냐민은 호르크하이머가 보낸 미국 비자와 스페인·포르투갈 통과 서류를 갖고 피레네산맥을 향해 떠났다. "내겐 이것이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라고 했던 가방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 초고가 들어 있었다. 9월 26일 밤 베냐민은 스페인 세관 직원의 최종 입국 불허로 '출구 없는 막다른 상황'에 이르자 국경의 작은 호텔방에서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