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투자자를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을 기리는 조각상이 세워진다면 그건 바로 ‘잭 보글(존 보글의 별명)’이 돼야 합니다."(워렌 버핏, 2017년 자신의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덱스 펀드의 아버지이자 월가(街)의 투자 대가인 존 보글 뱅가드그룹의 설립자가 16일(현지 시각) 미 펜실베이니아주(州) 자택에서 암 투병 끝에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뱅가드그룹은 세계적인 자산운용사로, 170개국에서 투자자 2000여만명을 거느리며 5조달러(약 5608조원)가 넘는 자금을 관리하고 있다.
1974년 뱅가드그룹을 설립한 보글은 1996년까지 20년 넘게 직접 경영하며 최고경영자(CEO)로 있었다. 그는 시장 지수를 추종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시장 지수만큼의 수익을 얻는 인덱스 펀드를 만들었다. 싼 수수료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인덱스 펀드는 ‘투자 민주화’를 이끌었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보글을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버핏은 인덱스 펀드가 개인 투자자의 수수료 부담을 덜어줬다고 극찬하며 수수료만 비싼 헤지펀드(다양한 투자전략을 사용해 수익률을 높이려는 펀드)보다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 대공황 딛고 ‘투자 거물’ 된 보글
보글은 1929년 5월 미국 뉴저지주 동북부 도시인 몬트클레어에서 쌍둥이 중 형으로 태어났다. 쌍둥이 동생인 데이비드 보글은 25년 전인 1994년에 숨을 먼저 거뒀다. 보글의 어린 시절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재산을 잃었고 이로 인해 부모님은 이혼했다. 어린 보글은 10살 때부터 신문 배달 등을 하며 돈을 벌었다.
보글은 뉴저지주에 있는 블레어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이후 그는 1951년 프린스턴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에서 초기 뮤추얼펀드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산운용사인 웰링턴 매니지먼트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한 보글은 관리자로서도 빠르게 성장해 회사 설립자인 월터 모건의 신임을 얻었다. 보글은 1967년 웰링턴 매니지먼트 사장 겸 CEO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오래 있진 못했다. 그는 당시 기업 인수합병 문제와 인사 문제 등에 엮어 1974년 해고됐다. 보글은 당시 인수합병 문제를 두고 "생애 최대 실수"라고 회고했다.
위기는 기회가 됐다. 이 실수는 뱅가드그룹 설립으로 이어졌다. 회사명인 ‘뱅가드’는 영국이 19세기 내내 세계 바다를 장악하게 했던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탄 군함 ‘뱅가드호’에서 따왔다. 뱅가드그룹은 1975 세계 최초로 인덱스 펀드를 출시하며 창립 1년 만에 자산운용 규모 1조7000억달러(약 1907조원)를 달성했다. 이후 뱅가드그룹은 연일 성장해 세계적인 자산운용사가 됐다. 전문가들은 곧 뱅가드그룹이 현재 세계 1위 운용사인 ‘블랙록’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보글은 그리 건강하지 않았지만 활발한 투자 활동과 저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밤샘 근무로 30세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던 그는 평생 심장병에 시달렸다. 1996년에는 심장 이식 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자지침서’ ‘모든 주식을 소유하라’ 등 투자 관련 책 13권을 썼으며 1996년까지 뱅가드그룹 회장을 지냈다. 이후에도 2000년까지 뱅가드그룹 명예회장을, 이후에는 보글 금융시장 리서치센터 대표로 꾸준히 투자자에게 투자 방향을 안내했다.
보글의 개인 재산은 8000만달러(약 89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투자자의 이익을 최선으로 생각하다 보니 돈이 들어왔다"고 했다. 보글은 아내 이브 보글과 결혼해 슬하에 자녀 여섯명을 두고 있다. 갑부가 된 보글은 그가 다녔던 블레어 아카데미 고등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 인덱스 펀드의 성공, ‘월가의 성인’ 된 보글
인덱스 펀드를 최초 출시한 뱅가드그룹은 ‘인덱스 펀드의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뱅가드그룹은 적극적으로 종목을 찾아 투자하는 액티브펀드 위주였던 당시 펀드시장에 패시프펀드 성격인 S&P500지수 추종 인덱스펀드로 출사표를 던졌다. 입소문을 탄 뱅가드그룹의 간판 펀드인 ‘뱅가드500인덱스펀드’는 높은 수익률을 올렸고, 투자자들이 몰려들어 회사는 세계적인 자산운용사가 됐다.
보글은 펀드회사와 펀드매니저들이 높은 수수료를 받으며 투자자를 착취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이런 보글의 발언을 불편해한 펀드업계는 그를 ‘골칫덩이’로 취급했다.
그러나 인덱스 펀드는 연일 상승 곡선을 그렸다. 운용 규모 1100만달러(약 123억원)에서 시작한 뱅가드500인덱스펀드는 수익률이 액티브펀드를 앞서면서 현재 4000억달러(약 450조원)를 넘어섰다. 뱅가드 그룹은 수수료가 저렴한 인덱스 펀드를 제공해 미국 펀드산업의 수수료를 낮추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인덱스 펀드 등 수수료가 낮은 펀드에 투자하는 추세가 굳어졌다.
그는 ‘상식에 기반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철학을 설파했다. 그는 생전에 "적은 비용이 드는 펀드를 이용하고 평생 그걸 갖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수료를 비롯한 투자 비용을 최소화하는 게 최선의 투자전략 중 하나라는 뜻이다.
‘보글의 열렬한 지지자’인 버핏도 투자자들에게 비용이 저렴한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2017년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총에서 헤지펀드 매니저를 비롯한 월가의 투자 전문가들이 비싼 수수료 값을 못한다고 비난하며 인덱스 펀드를 예찬했다. 또 버핏은 자신이 죽은 뒤 아내에게 남길 돈 대부분이 뱅가드그룹의 인덱스 펀드에 투자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덱스 펀드가 승승장구하고 투자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철학이 알려지면서 보글은 ‘월가의 성인(세인트 존)’으로 칭송받았다. 보글은 포천지 선정 ‘20세기 투자산업의 거인’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팀 버클리 뱅가드그룹 CEO는 "잭 보글은 전체 투자산업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개인이 그들의 미래나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버튼 맨킬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이자 ‘시장 변화를 이기는 투자’ 저자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모든 사람이 보글을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신경 쓰든 상관하지 않지 않았다. 그는 강인했다"고 평했다.
◇ 죽기 전까지 활발한 활동…비트코인에 쓴소리
보글은 지난해 말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CNBC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12월 31일 올해 주식 비중을 줄이고 채권 등 방어적인 전략 투자를 늘리라고 조언했다. 지난해 11월 뉴욕증시 변동이 계속되자 "펀드에 장기 투자를 하라"고 했다.
그는 암호자산(가상화폐) 광풍에도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건 미친 짓"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2017년 11월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행사에서 그는 "비트코인에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트코인은 증빙 수익률이 없다. 채권은 이자, 주식은 기업 실적과 배당이 있지만 금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비트코인을 지탱하는 것은 자신이 산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는 기대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비트코인이 다시 100달러(약 11만원)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