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게 맞고, 위협당하는 정신과 의사들
미국, 캐나다는 '퇴로'확보 의무화
개인병원보다 종합병원이 더 취약
지난해 4월 충청북도 종합병원, 조울증(양극성 장애)환자 A씨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9.9㎡(약 3평) 크기 진료실에 의사 김모(여·37)씨와 환자 둘이 앉았다. 의사 김씨가 약물치료 이야기를 꺼내자, A씨가 괴성을 지르며 의사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김씨는 출입문 쪽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흥분한 A씨에게 붙잡혔다. A씨가 팔꿈치로 김씨의 얼굴에 내리 꽂았다. 코뼈가 부러졌다. 보안요원이 도착할 때까지 구타가 이어졌다. 의사는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정신과 의사인 제게 그 일은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맹수우리에 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출입구를 반쯤 열어두고 진료하고 있지만, 또 위기상황이 벌어지면 흥분한 환자 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씨 얘기다.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정신과 의사
강북삼성병원의 신경정신과 의사가 살해당했다. 극단적인 경우다. 그러나 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 의사들은 "흥분한 환자들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대한의사협회 성종호 정책이사(정신과 전문의) 팔뚝에는 선명한 흉터가 있다. 진료하던 환자가 돌연 "CIA(미국 중앙정보국)가 내 치아에 도청장치를 끼워 넣었다"면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 이사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성 이사는 "정신병동에 입원한 환자는 열흘이 고비"라면서 "이 무렵부터 의료진을 ‘가해자’로 여기는 환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정신과 레지던트(전공의) 황모(29)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과 환자들은 흥분하면 괴력이 나옵니다. 철판 석 장을 덧댄 격리공간을 부수고 나온 환자가 의사를 폭행하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매일 심지가 어디 있는지 모를 폭탄을 안고 사는 것이 정신과 의사입니다."
◇한국의 정신과 진료실에는 비상 대피로가 없다
대한의사협회는 "일상적인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예방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비상 대피로' 마련이 그나마 최적의 대안으로 거론된다. 최대집 의협회장은 "대피로가 없는 한국의 정신과 진료실에서는 의사가 일방적으로 구타당하거나 숨지는 일까지 벌어진다"며 "미국에서는 환자가 고성만 질러도 의사들이 대피할 수 있는 비상문으로 대피한다"고 말했다.
서울 신촌의 한 종합병원 전문의 얘기다. "미국 종합병원 정신과 진료실에 대피 공간이나 대피로를 만들어둡니다. 이는 미국 각 주(州)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인데, 의료진이 공격성을 띄는 환자에게 고립되지 않도록 진료실을 설계하도록 권고합니다. 의사가 비상시에 어디로 탈출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피신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료실 내부에는 가구 하나를 배치하는 데도 엄격한 규칙에 따릅니다."
실제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비상 대피로’ 가이드라인을 권고하고 있다. 대피로 마련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 예방책이 있다. 이를테면 캘리포니아 정신병동에는 시야(視野) 사각지대가 없다. 코너마다 볼록거울을 설치해 ‘기습’을 에방하는 것이다. 병원에 따라 금속탐지기도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환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로 거론조차 되지 않는 예방책이다.
지난달 31일 강북삼성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47) 교수를 살해한 피의자 박모(30)씨도 미리 33cm 길이의 흉기를 챙겨왔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또한 환자가 진료실·대기실로 이동할 때는 보안요원이 동행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것은 개업의다. 개인병원을 열 때 진료실 책상 부근에 대피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설계단계에 관여할 수 없는 종합병원에서는 난망한 일이다. 정신과 레지던트 박모(29)씨는 "10여년전에도 진료실에 비상문을 설치한 미국의 사례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며 "전문의 시험을 앞둔 이 시점에도 한국 의료진들의 안전은 나아진 바가 없다"고 했다.
조울증 환자에 의해 숨진 임세원 교수의 발인은 4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