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52)씨는 지난해 10월 23일 밤 서울 동작구의 왕복 2차선 도로로 우회전해 진입했다. 그런데 맞은편 차선에 서 있던 택시가 갑자기 경적을 울렸다. 길에 누워 있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고씨는 술에 취해 도로에 누워 있던 민모(62)씨를 치었다. 민씨는 다음 날 숨졌고, 고씨는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로 기소됐다.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고씨 측은 "피해자가 늦은 밤 어두운 도로 한가운데 검은 옷을 입고 누워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5(유죄)대2(무죄)로 유죄로 판단하고 벌금 600만원을 평결했다. 지난 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 27부도 이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고씨가 전방 주시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운전자가 주변을 제대로 보지 않고 사고를 내면 업무상 과실 책임을 지게 된다. 고씨 같은 경우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사람이 사망해도 운전자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가 있다. 운전자에게 '사고의 예견 가능성'이 없었다고 판단돼 업무상 과실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다.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무단 횡단으로 인한 사고 등 돌발적인 상황에서 자동차 사고가 난 경우 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 운전자가 그런 상황까지 예견하고 대비할 의무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울북부지법은 지난 5월 교차로 횡단보도에서 무단 횡단을 하던 6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화물차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길에 누워 있는 사람을 치어 사망하게 한 경우는 무단 횡단과 달리 대부분 운전자 과실이 인정된다. 사고의 예견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구지법도 지난 9월 우회전 중 약 5m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 승합차 운전자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한문철 변호사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보행자와 달리 누워 있는 사람은 예견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게 법원 판단"이라며 "고속도로나 급커브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유죄가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