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 다이닝의 최대 화두는 '밥', 밥 짓기에 혼신의 힘 기울여
밥심 살린 정교한 솥밥, 밥전 등 창작 요리 봇물

모던 한식당 ‘가온’에서 내는 솥밥. 김병진 셰프는 “솥밥은 가온 대표 요리”라고 했다.

요리사 장진모씨의 밥 짓는 과정 설명은 정교하고 과학적이었다. 이것이 과연 밥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화성 무인탐사선에 대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쌀은 백진주와 골든퀸 두 품종을 7대3 비율로 섞어요. 쌀을 체에 받쳐 흐르는 물에 빠르게 1차 세척합니다. 그런 다음 볼(bowl)에 담고 물 받아서 2차 세척합니다. 물이 탁해지지 않는 수준까지, 쌀 표면에 묻은 전분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쌀을 냄비에 넣고 물을 마른 쌀 기준 1.2배 부어요. 뚜껑을 연 채로 인덕션 레인지에 올립니다. 와트(watt)수(쉽게 말해서 화력)가 조절되는 인덕션 레인지를 씁니다.

일반 가스 불은 화력이 그때그때 다르거든요. 반면 인덕션은 균일하고 미세한 조정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2000와트(가장 센불)에 올려서 끓기 시작하면 젓습니다. 밥물이 액상풀 농도가 되고, 밥알이 알알이 따로 움직이다가 합쳐져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나면 그만 젓고 200와트(가장 약한 불)로 줄입니다. 뚜껑을 닫고 완전히 익히고 2분 뜸 들여 검은 도자 밥솥으로 옮겨 담고 1~2분 더 뜸 들여서 손님에게 나갑니다."

레스토랑 ‘묘미’에서는 메인코스로 정성 들여 지은 밥을 국, 8가지 김치·장아찌와 함께 낸다.

장씨가 쌀밥 짓기에 이토록 정성 들이는 건 그가 널리 알려진대로 ‘공대 출신 요리하는 뇌섹남’이라서가 아니다. 지난 1일 서울 논현동에 문 연 그의 레스토랑 ‘묘미’에서 밥이 메인코스이기 때문이다. 파인다이닝(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등 육류가 아닌 밥이 메인인 경우는 드물다.

"한식의 역사를 조사해보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게 밥과 국, 김치였어요. 그중에서도 밥은 한식의 중심이고요. 한식을 기본으로 음식을 한다면 밥을 중요하게 다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장 맛있는 밥 짓기를 궁리했습니다."

◇ 쌀 소비량 줄어들지만, 맛있는 밥을 향한 욕구 늘어

더이상 ‘밥심’으로 살지 않는 시대다. 쌀 소비량과 밥 섭취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미식의 최전선에 서있는 요리사들에게 밥은 오히려 최고의 화두가 됐다. 밥이 주식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위기를 맞은 동시에 미식의 중심에 다가서는 분위기다.

밥에 대한 관심은 소위 ‘모던 한식’을 하는 요리사들 사이에서 유독 크다. 모던 한식이란 전통 한식을 기반으로 하되 오늘날의 소비자와 요구에 맞춰 재해석한 한식을 말한다. 가온(별 3개), 라연(별 3개), 권숙수(별 2개) 등 세계적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 서울편에서 높은 평가(최고 3개)를 받은 모던 한식 음식점에서는 밥이 코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그만큼 최고의 밥맛을 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서울 신사동 ‘가온’ 김병진 셰프는 "솥밥은 가온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식당의 솥밥은 계절마다 바뀌는데, 지금은 등심구이 솥밥과 버섯 솥밥이 나간다. 등심구이 솥밥은 소 사골과 사태 육수를 각각 우려 섞은 뒤 콘소메(프랑스 수프)처럼 맑게 뽑는다. 여기에 그날 도정한 쌀을 넣고 지은 밥에 소고기를 얇게 저며서 딱딱하게 말리고 가루 낸 다음 조선간장과 같이 끓여낸 파평윤씨댁 내림음식 ‘천리장’을 얹어 낸다. 버섯 솥밥은 버섯 육수를 뽑아서 밥과 세 가지 버섯을 넣고 짓는다.

한식 상차림은 ‘밥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까’에 대한 해답으로 발전해왔다. 35년간 한식을 조리하고 연구해온 요리사 조희숙씨는 서양식 코스로 한식을 내되 제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조희숙씨는 짭쪼름한 생선조림처럼 밥과 먹어야 제맛 나는 한식을 ‘밥전’에 올려 새로운 요리로 재창조했다.

그가 자문을 맡고 있는 서울 원서동 ‘한식공간’과 삼성동 ‘한식공감’에서는 젓갈과 생선조림의 간을 줄이지 않고 원래대로 짭쪼름하게 내는 대신, 쌀밥을 전 형태로 빚은 ‘밥전’에 올려서 낸다.

"심심한 밥이 전제되는 한식에서 반찬은 맛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짜고 매운 반찬을 맛있게 먹으려면 밥이 반드시 필요한데, 각각의 요리가 순서대로 나오는 ‘시간전개형’ 서양 상차림에서는 반찬을 하나의 일품요리로 섭취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간이 심심해져 제맛이 나지 않게 됩니다. 밥전은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 나온 시도입니다."

김병진 셰프는 "밥은 한국 밥상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숟가락을 사용하는 한국 식문화만의 특징을 드러내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이라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한식이 인기를 얻을수록 밥이 세계 미식에서 차지하는 부분도 커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