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더미에서 건진 플라스틱, 힙한 패션이 되다
버려진 페트병 16개로 만든 가방 대박...재생 플라스틱 의류 대세
패션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요즘 이 가방이 화제다. 주름이 잡힌 이 니트 가방은 올해 7월 처음 출시된 이래 지금까지 1만 개 넘게 팔려나갔다. 출시되자마자 유명 브랜드와 협업해 매진을 기록하더니, 서울 강남권 백화점에 속속 입점했다. 없어서 못 판다는 이 가방, 대체 인기 비결이 무엇일까?
바로 페트병을 재활용한 친환경 원사로 제작됐다는 것. "가방 하나에 500mL 페트병 16개가 들어갔어요. 원단을 재단해 만든 것이 아니라, 가방 모양대로 편직 했기 때문에 자투리 원단도 나오지 않죠. 이런 콘셉트가 고객들을 사로잡은 거 같아요." 왕종미 플리츠마마(Pleatsmama) 대표의 말이다.
◇ 페트병 36개로 셔츠 만들고, 60개로 롱패딩 만들어
미국 의류업체 에버레인도 지난 10월 300만 병 이상의 폐트병을 사용해 ‘리뉴(ReNew)’ 컬렉션을 내놓았다. 플리스 집업 셔츠엔 36개의 페트병이 사용됐고, 롱패딩에는 60개의 페트병이 들어갔다. 이 회사는 2021년까지 제품과 포장지,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집기 등을 재생 원료로 바꾸기로 했다.
일회용 용기와 빨대, 비닐 등 전 세계적으로 플라스틱 퇴출 운동이 활발하다.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와 폐비닐 수거 중단 사태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플라스틱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우리가 입는 옷과 신발 역시 플라스틱과의 연관성을 피할 수 없다. 폴리에스터, 나일론, 아크릴 등 의류 소재로 주로 쓰는 합성섬유가 플라스틱과 같은 원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들 소재도 플라스틱처럼 자연 분해되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킨다. 문제는 한 철 입고 버려지는 옷이 너무 많다는 것. 국내만 해도 매년 8만여 톤의 의류 폐기물이 발생된다.
상황이 이렇자 패션계가 플라스틱 사용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독일 스포츠 의류 업체 아디다스는 2024년까지 모든 제품을 재활용 폴리에스터로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2016년부터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로 ‘오션 플라스틱’이란 소재를 개발해 러닝화와 운동복 등을 만들고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현재까지 약 145톤의 폐기물을 재활용해 의류를 만들었다. 이 밖에도 H&M, 팀버랜드, 노스페이스, 나우 등이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원단으로 옷과 신발을 만든다.
재생 폴리에스터는 순수 폴리에스터와 품질이 거의 같지만, 에너지 사용량이 59% 적고 원재료의 원천인 석유의 의존도도 낮다. 파타고니아 측은 "폐기물을 줄여 매립하거나 소각할 때 발생하는 독성 물질을 줄일 수 있다. 또 더 이상 착용할 수 없는 폴리에스터 의류의 재활용 흐름을 촉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 버려진 페트병으로 만든 가방이 대박 날 줄이야
패션계가 갑자기 플라스틱 재생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1993년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가 처음 페트병을 재생해 티셔츠를 만든 이래, 많은 브랜드가 플라스틱 재생 의류를 선보였다.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 프로젝트로 그쳤는데, 그 이유는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플리츠마마에 폐페트병으로 만든 원사 ‘리젠(Regen)’을 공급하는 효성 관계자는 "일반 폴리에스터보다 재생 폴리에스터의 가격이 1.3~1.8배 정도 비싸기 때문에 사용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짚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친환경 제품을 선택하려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패션 업계의 문의가 늘고 있다고 했다.
친환경 소비에 대한 관심 증가는 여러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시장조사기관 민텔에 따르면 젊은 밀레니엄 세대(17~26세) 중 44%가 환경친화적인 원단으로 만든 옷을 원한다.
스타트업 업체의 경우 플라스틱 재생을 브랜드 가치로 내세우기도 한다. 20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론칭한 신발 업체 로티스(Rothy’s)는 지금까지 약 1950만 개의 페트병을 재생해 신발을 만들었다. 이곳의 신발은 메건 마클 영국 왕세자빈이 신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플리츠마마 역시 ‘페트병으로 만든 가방’이라는 콘셉트로 별다른 홍보 없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왕종미 대표는 "고객들이 SNS에 가방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를 달아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내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일본인이 가방을 구매하고 싶다고 연락해 오기도 했다"며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내년에는 의류와 신발까지 상품을 확대하고 해외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이젠 지구에 도움 되는 것이 패셔너블한 것
물론 재생 폴리에스터로 만든 옷을 입는다고 해서 플라스틱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순 없다. 재활용 플라스틱 의류는 환경 폐기물을 줄이고 옷에 사용되는 순수 플라스틱의 양을 줄이는데 도움 되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미세 플라스틱은 다시 해양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 2016년 파타고니아가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대학에 의뢰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합성 양털 재킷을 세탁할 때 평균 1.7g의 미세 섬유가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패션업체가 제작부터 사후 관리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파타고니아의 경우 미세 섬유를 걸러주는 세탁망을 출시해 세탁 시 합성 섬유로 제작한 의류를 넣어 빨 것을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