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서울 여의도에서 승용차가 시내버스를 들이받았다. 승용차 운전자는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비틀거렸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음주 측정을 거부했다. 경찰서에선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호통만 쳤다. 경찰이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했더니 정치인이었다. 대선 때 어느 후보의 특보단 부단장이었다. 이 사람만이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는 심심찮게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다.
▶청와대 경호처 직원이 지난 주말 새벽 서울 술집에서 처음 어울린 상대와 말다툼 끝에 코뼈가 부러질 만큼 폭행했다. 서른여섯 살 5급 직원인 이 사람은 출동한 경찰관에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했다. 청와대는 이 사람을 대기발령했다.
▶청와대·국정원·검찰·법원 같은 권력 기관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다. 대기업 오너와 임원, 사회단체 대표들도 "내가 누군지 아느냐"를 불쑥 꺼내곤 한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 VIP·선수 전용 출입구 앞에서 70대 남성이 고함을 질렀다. "내가 누군지 알아?" 스포츠단체 회장을 맡고 있던 이 기업인은 출입증 없는 지인과 함께 들어오려다 안전 요원에게 제지당했다. 분을 참지 못한 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여기선 내가 왕(王)이다."
▶'피해자'나 '약자'라면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2014년 대형 참사 가족대책위 간부들이 저녁 식사 후 대리기사와 시비가 붙은 끝에 "우리가 누군지 알아?"라고 윽박질렀다. 어떤 경우에는 대형 참사 유가족이 '권력'이 되기도 하는가 보다. 요즘 신흥 권력층으로 떠오른 인터넷 파워 블로거들도 툭하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가게 문 닫게 해주겠다"는 협박까지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는 사람들의 심리 바탕에는 누구든 자신을 알아서 모셔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있다. 자신은 원래 법이나 규칙 따위는 시시콜콜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 널리 알려진 인물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몸조심하는 경우가 많다. 저명하지는 않지만 자기 나름으로는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몰라주는 상대에 화가 나는 모양이다. 술김에 그런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이 '내가 누군지 아느냐'다. 한국인 중 외국에 나가서도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So what?(그래서 뭐 어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