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게 부친 프랑스식 전병 '크레이프'
'수직으로 갈라 먹기' vs. '한 켜씩 벗겨 먹기' 의견 분분
최근 출장차 대전에 간 김에 떡부터 빵을 거쳐 케이크까지, 골목을 휩쓸며 성심당의 제품을 한 보따리 사들고 왔다. 지역 빵집의 춘추전국시대인데, ‘업데이트’가 적절히 안 돼 추억을 양념 삼아 먹어야 하는 곳도 꽤 있지만 성심당은 예외에 속한다. 옛날 분위기 나는 빵과 더불어 요즘 유행인 것들도 그럭저럭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티라미수 크레이프 케이크를 발견하고 낼름 집어들었다.
티라미수보다 크레이프가 궁금했다. 탕수육의 ‘부먹’과 ‘찍먹’ 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크레이프 케이크 먹는 법을 둘러싸고 일종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포크로 단숨에 켜 전체를 수직으로 갈라 먹기와 한 켜씩 벗겨 먹기가 그럴싸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한 켜씩 벗겨 먹는 재미’를 강조하는 전문점도 등장했다.
그래서 크레이프 케이크가 눈에 띄면 일단 사고 본다. 그리고 포크를 들고 수직으로 켜 전체를 갈라본다. 부드럽게 잘리면 합격, 아니면 불합격이다. 성심당의 케이크는 일단 합격이었다. 무리없이 켜 전체가 사르르 갈렸으며 크레이프는 물론 사이사이의 크림 켜 또한 매끄럽고도 부드러웠다. 그렇다, 나는 크레이프 케이크 또한 여느 케이크처럼 켜 전체를 수직으로 갈라서 먹는 음식이라고 본다.
◇간식·아침식사였던 크레이프, 일본에서 케이크로 거듭나
크레이프는 프랑스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원어인 ‘크레프(crêpe)’는 ‘둘둘 말린’이라는 뜻의 라틴어 ‘크리스파(crispa)’에서 나왔는데, 서양에서는 얇은 팬케이크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전병의 일종이라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하다. 구절판 같은 음식에서 여러 재료를 한데 아우르는, 하늘하늘하고도 부드러운 전병 말이다.
누텔라나 잼 등 단맛의 재료도, 버섯이나 치즈처럼 짠맛의 재료도 잘 어울려 오랫동안 간식이나 아침 식사의 붙박이였던 크레이프는 일본에서 케이크로 거듭났다. 도쿄의 카페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을 커피 프랜차이즈 도토루가 따라 만들면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그렇게 겹이 많은 건 아니지만 밀푀유(mille-feuille)처럼 ‘천(mille)’이라는 프랑스어 숫자를 붙여 ‘밀크레이프(mille crepe)’라 일컫는다.
크레이프의 재료는 단순하다. 밀가루·계란·설탕·우유·식용유가 전부다. 그에 비해 만들기는 약간 까다롭다. 일단 밀가루 음식의 핵심을 책임지는 글루텐을 발달시켜서는 안된다. 밀가루에 물을 더하면 만들어지는 단백질인 글루텐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일단 효모를 써 긴 시간 발효시키는 빵이라면 최대한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발효 과정에서 팽창하는 반죽을 지탱해주는 한편 맛도 돋워주기 때문이다.
반면 그 밖의 빵이나 과자류에서는 발달하면 질겨지므로 같은 이유로 최대한 회피한다. 베이킹 소다 같은 즉석 팽창제를 쓰는 머핀, 팬케이크 등의 즉석빵, 즉 ‘퀵브레드(quick bread)'류가 글루텐을 회피하는 대표적인 예이니 팬케이크의 사촌격인 크레이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믹서로 줄줄 흐르는 반죽을 만들지만 재료를 가볍게 섞어 주는 수준에서만 그친다.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크레이프 부치기
크레이프를 찢어지지 않으면서도 하늘하늘하게 부쳐내는 데도 숙달된 솜씨가 필요하다. 약불에 오래 은근히 달군 논스틱 팬에 반죽을 조금만 붓고 익기 전에 재빨리 팬을 전후좌우로 기울여 최대한 고르게 펴발라 준다. 불에 닿은 면이 완전히 익으면 고무 주걱 등으로 바닥을 조심스레 훑어 떼어낸 뒤 두 손으로 가볍고도 재빨리 들어올려 뒤집는다.
이렇게 부쳐낸 크레이프를 식힌 뒤 사이사이에 각종 크림을 역시 얇게 펴발라 켜켜이 쌓는다. 맛도 중요하지만 켜의 수나 다양함으로 케이크를 평가할 수 있는데, 밀크레이프도 예외는 아니라서 스무 장 쯤은 겹쳐야 제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쌓기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잊힐 때 쯤이면 한 번씩 크레이프를 부쳐 아침으로 먹는지라, 한 번은 정말 스무 장 쯤을 부쳐 케이크에 도전해 보았다. 크레이프 각각은 얇지만 쌓아 올릴 수록 드러나지 않는 두께의 들쭉날쭉함이 조금씩 두드러지게 된다. 그리하여 스무 장은 언감생심, 열 장을 넘기면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시판되는 밀크레이프도 잘 살펴 보면 쐐기 모양 조각의 바깥부터 맨 안쪽까지 두께가 완전히 일정한 제품이 있는 반면, 가운데로 들어갈 수록 솟아 오르는 것도 있다. 둘의 차이는 미세해 보이지만, 전자가 쌓이는 걸 염두에 두고 좀 더 일정하고도 세심하게 부쳐냈음을 시사한다.
글루텐의 발달을 최대한 억제한 얇은 전병의 사이사이에 역시 부드러운 크림을 얇게 펴 발라 쌓아 올린다. 이를 맛이 어우러지도록 냉장보관하면 그 사이에 크림에서 수분이 나와 가뜩이나 부드러운 크레이프의 켜를 한층 더 야들야들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여느 케이크가 그렇듯 각각의 켜가 눈에 확실히 들어오는 가운데 수직으로는 한데 어우러진 음식이 된다. 이렇게 제대로 만든 밀크레이프라면 포크로 한 켜씩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켜가 한데 잘 어우러질 것이다.
◇ ‘벗겨먹기’는 비빔밥에서 나물 따로 밥 따로 먹는 격
그래서 크레이프 케이크를 반드시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음식은 대체로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니 타인에게 실질적인 손실을 끼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우리가 늘 관심을 품는 연원이나 역사, 또한 이를 바탕 삼은 조리법이나 재료의 특징 등을 한데 아울러 감안한다면 맛을 좀 더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크레이프 케이크의 경우라면, 수직으로 전체 켜를 갈라 먹기가 그렇다. 혹시나 싶어 일본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파티셰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는 ‘밀크레이프를 한 켜씩 벗겨 먹는 건 비빔밥 안 비비고 나물 따로 밥 따로 먹는 것과 같다’라는 비유를 들었다.
◆ 이용재는 음식평론가다. 음식 전문지 ‘올리브 매거진 코리아’에 한국 최초의 레스토랑 리뷰를 연재했으며, ‘한식의 품격’, ‘외식의 품격’, ‘냉면의 품격’ 등 한국 음식 문화 비평 연작을 썼다. ‘실버 스푼’, ‘철학이 있는 식탁’, ‘식탁의 기쁨’, ‘뉴욕의 맛 모모푸쿠’, ‘뉴욕 드로잉’ 등을 옮겼고, 홈페이지(www.bluexmas.com)에 음식 문화 관련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