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엔 누구나 15분 만에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팝아티스트였던 앤디 워홀이 이 말을 했을 때 단서를 하나 달았어야 했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9' 공개 행사에 등장한 영국의 팝아티스트 '미스터 두들'(Doodle·본명 샘 콕스)이 그런 경우다. 올해 24세인 이 청년 예술가는 재능을 갖췄고, 15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유명해졌다. 작년 5월 런던 올드스트리트역의 한 가게에서 즉석 드로잉을 하는 10분 분량의 동영상이 소셜 미디어를 타고 퍼지면서 소문을 탔다. 영상은 순식간에 조회 수가 4000만회가 넘었고, 팬이 생기기 시작했고, 전 세계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왔으며, 급기야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 회사가 내놓는 신제품 공개 행사에 초청받은 것이다. 이날 미스터 두들이 무대에서 갤럭시노트의 펜을 들고 터치 스크린에 낙서하듯 그려나가는 그림을 본 관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삼성뿐 아니라 한국 미술계도 그에 주목했다. 지난달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미스터 두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21일 전시회에서 만난 미스터 두들은 노련한 예술가라기보다 관객과 눈맞춤도 쑥스러워하는 홍안(紅顔)의 청년에 가까웠다.
"갤럭시노트 공개 행사 후에 부쩍 '유명해진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많이 들어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삼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죠. 그런 대단한 회사의 무대에 초청된 것 자체가 영광이긴 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지켜본 무대였을 거에요. 하지만 그 후로도 전 그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릴 뿐이에요."
'끼적거리다(doodle)'라는 뜻의 예명처럼 얼핏 보면 미스터 두들의 작품은 어린아이가 되는 대로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정교한 메시지와 유머를 담고 있다. '교통지옥'이란 제목의 작품을 보면 다양한 도로의 무법자 군상(群像)을 만화 같은 필치로 그려냈다. 단순함 속에 심오함을 담는 현대 팝아트 정신을 충실히 따르는 셈이다.
"낙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예술 양식이란 점이 제겐 가장 큰 매력입니다. 전 제 작업을 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별 계획 없이 발 닿는 대로 가는 게 산책의 매력이잖아요. 먼저 영감과 손이 이끄는 대로 작업합니다."
네 살 때부터 집의 벽과 바닥에 낙서를 했다는 미스터 두들은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지만 집요한 노력의 산물이다. 작품은 즉흥적으로 그리지만 작품에 필요한 자료 조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낙서로 북한 김정은의 초상화를 표현한 작품 속에 냉면이나 평양의 류경호텔 같은 북한 관련 이미지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걸 보니 설명이 납득갔다.
미스터 두들은 일종의 악당인 '닥터 스크리블'이란 정체성도 갖고 있다. 어둡고 냉소적인 작품을 그릴 때는 검은 옷을 입고 닥터 스크리블을 연기하는 것이다. 일종의 배우 같은 활동을 하는 셈인데, 일각에선 "유치한 어린이 낙서를 심오한 척 팔려는 팝아트 지망생"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정작 본인은 "소셜 미디어에 달리는 모든 악플을 읽으려고 한다"며 "비판 역시 충고라고 생각하면 거리낄 게 없다"고 웃어넘긴다고 한다. "제일 많이 듣는 말이 '그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다'는 말이죠. 맞는 말이에요.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그리지 않았고 저는 그리고 있단 점이죠(웃음)."
시원시원한 웃음만큼은 누구보다 예술가처럼 보이는 이 청년의 전시는 다음 달 9일까지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문의(02)733-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