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 개 옷걸이가 행거에 촘촘히 걸려 있다. 옷걸이에 걸린 건 옷이 아니라 그림이다.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옛 공간사옥)에서 열리는 노상호(32) 작가의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 II'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이다.
노 작가는 2012년부터 매일 최소 한 점의 그림을 그려왔다. 구글에서 검색하거나 소셜미디어에서 본 이미지를 출력한 다음, 뒤가 비치는 먹지를 대고 테두리만 딴다. 이를 A4 크기 종이에 옮긴 다음, 수채 물감으로 색을 칠한다. 한두 시간 걸리는 작업이지만, 여행을 가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하루 여덟 시간 일하는 그는 "강박이 있다. 작업을 한 시간만 줄여도 드로잉 한 점이 날아간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저는 먹지 같은 존재예요. 저라는 먹지가 세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그걸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는 거죠."
노 작가의 드로잉은 액자가 아닌 투명한 비닐에 담겨 옷걸이에 걸린다. "팔랑팔랑거리고, 반짝반짝거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서"란다. 그림을 옷 걸듯 걸어놔서 보기 힘들다는 말에 그는 "SPA(저가) 브랜드의 옷을 소비하듯 내 작품을 소비했으면 좋겠다. 최대한 쉽고, 빠르게, 많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보여주는 게 내 작업이다"고 했다. 전시 제목에 들어간 '챕북'이란 단어도 얇고 저렴한 대량생산 출판물이란 뜻. 가볍게 읽히고 쉽게 소비된다는 점에서 전시와 맞는다.
홍익대에서 판화를 전공한 노 작가는 혁오 밴드의 모든 앨범 표지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고, 인스타그램에서도 꽤 인기다.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송은아트큐브 등에서 전시하면서 평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유망 작가다. "옷걸이에 걸린 제 그림을 보려면 그림에 손을 대야 합니다. 미술을 잘 알고 그림을 자주 보신 분들일수록 그림에 손을 잘 못 대요. 하지만 인스타그램에서 제 그림을 접한 어린 친구들은 거리낌이 없어요. 그들은 알거든요. 이미지엔 아우라가 없다는 걸요."
전시장 한가운데 세로 3m, 가로 2.2m짜리 대형 걸개그림 넉 점이 걸려 있다. 매일 드로잉하는 작품을 다시 이곳에 옮긴 것이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이미지를 수집해, 저장이나 복사를 하고 다시 편집하는 방식은 요즘 사람들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과 일치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올해 1월 1일부터 접한 이미지들을 모은 것이다. 노 작가는 스스로를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 같은 가상과 현실에서 쏟아지는 이미지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얇고 넓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얇고 넓어야 '그레이트'해질 수 있는 시대다. 내년 2월 10일까지, (02)736-5700.